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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프로들의 원형경기장

by 늙은소 2007. 4. 10.

FTA 협상이 막바지였던 며칠 전, 함께 일하는 후배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시위하는 농민들을 비췄고, 후배는 '저렇게 반대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농업이든 어떤 분야이든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성공해야 그 분야도 살아남는다는 논리였다.

울컥하는 마음에 한참을 후배 앞에서 떠들었다.

예전에는 나도 그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믿을 것은 머리 뿐이었기에.. 내 능력과 내 실력, 내 열정과 노력으로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기 위해 경쟁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세계가 나에게 유리하며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 믿어왔다. 뒤쳐지는 사람, 조직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사라져도 될 것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공무원도 성과를 평가하고 능력이 부족하면 도려낸다고 하던가. 몇년 전이었다면 대찬성을 하였을 것이다. 무능력한 사람이 자리 꿰차고 앉은 꼴을 어찌보느냐 함께 성토하며 그가 자신의 자리를 비우게 된 오늘의 현실 앞에 춤을 췄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싶다. 무능력하면 어떤가. 능력이 있는 자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회라니. 이런 논리가 잘못 확장되면 노인복지니 장애인 처우개선이니 하는 것과 상치되기 십상이다. 불필요한 존재와 걸리적거리는 존재는 없어져도 된다는 생각은, 그들이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그들이 갈 만한 곳이 있기는 한 건지.. 돌아보지 않는 냉정함과 좁은 시야와 함께한다. 왜 함께하는 방법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우선 생각해보지 않고, 제거하는 방법부터 창안해내는 것일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안일하게 살아도 되는 그런 자리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매 순간 자신의 고삐를 스스로 쥐어틀고 늘 긴장한 채살아야만 한다면 얼마나 숨이 막히겠는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숨어들 수 있는 곳이 필요한 법이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빈틈있는 조직도 필요하다.

...

최근 읽은 책 '삼미슈퍼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이런 맥락이라 반가웠다.

80년대 프로야구의시작은국민들을 스포츠에 열광하도록 만들어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것이 일차적 목표였다면, 장기화된 전략은 전 국민의 '프로패셔널화'라는 것이다.

당시의 슬로건들은 이렇다.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아마추어는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프로들의 룰을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며, 부상을 입게 되더라도 끝까지 달려가 공을 잡아야만 프로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원년 경기에서 박철순은 오비를 1등으로 만들었지만 바로 다음해에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할뻔 한다. 죽기살기로 하는 것이 프로의 정신이었다.

검투사들의목숨을 건싸움에 열광하듯 국민들은 자신이 다음번 검투사가 되리라는 것도 모른 채 경기장과 TV 모니터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프로라는게 그렇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만큼 위험부담을 안고 죽기살기로 뛰는 것이다. 그만큼 화면은 극적인 것이 되고, 구경하는 이들을 몰입시킨다. 그들은 젊을 때 벌어 30대 중후반에 은퇴를 한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뭘 하게 되는건지. 프로들의 경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지독한 노후불안증에 시달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보험광고로 도배된 원형경기장이다.

경기가 속개되겠다는 안내멘트가 경기장에 울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