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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극락도 살인사건 : 미스터리가 없어야 좋았을 영화

by 늙은소 2007. 5. 2.

극락도 살인사건

감독 김한민

출연 박해일,박솔미,성지루

개봉 2007.04.12 한국, 112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1986년 임춘애 선수가 막 골인지점에 들어서는 그 때, 남해안의 한 낚시꾼은 물에 불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사람의 머리를 끌어올린다. 며칠 뒤, 사건해결을 위해 형사들이 극락도에 도착한다. 그러나 섬은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모한 뒤였다. 섬에 있던 17명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좋아했다던 김한민 감독은 그의 첫 장편영화 데뷔작을 ‘미스터리 추리극’으로 시작한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분명 미스터리 추리극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17명은 수많은 억측과 추측을 낳게 하고, 가공할 범인의 존재와 다가오는 죽음에의 공포를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많은 추리물들이 제한된 공간에서의 살인을 다뤄왔다. 모리스 르블랑의 루팡시리즈가 도심에서 펼쳐지는 추격전을 매력적으로 그렸다면, 아가사 크리스티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퍼즐을 풀어나가듯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이 제한된 조건들이야 말로 탐정과 살인자 사이에 펼쳐지는 두뇌싸움의 무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범인이 숨어들기 어려운 공간이나, 혹은 범죄를 저지른 후 도저히 빠져나가기 어려운 고립된 환경에서의 살인이라든가,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연쇄살인. 모든 사람들의 알리바이가 분명히 성립되는 조건 같은 게 여기 해당한다.

 

탐정이 살인자와 두뇌싸움을 하는 동안 독자들은 추리소설 작가와 두뇌싸움을 펼쳐야 하고, 매번 작가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도 범죄자가 누구인지 밝혀지는 순간은 짜릿한 흥분과 설레임으로 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밀실 연쇄살인을 다룬 전통적인 추리소설과 조금 다른 출발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자행되는 연쇄살인사건은 범인의 트릭과 함께 그 동기가 중요한 역할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우연히 함께 모인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며, 이들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은 살인이 예정된 것이었음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극락도 살인사건]은 조금 다르다. 외지인에 비해 섬주민의 수가 더 많은 이곳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는 하여도 잔인한 복수가 계획적으로 펼쳐질 만큼의 복잡한 동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는 우리 중의 누군가가 살인자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한된 공간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 지켜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극락도 살인사건]이 굳이 추리물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이 처음부터 순진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어도 작은 공포가 공간의 제한된 벽면에 부딪히며 상호 출동하는 과정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영화의 장점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추리물로 시작해, 추리물이라는 장르를 비틀고 규칙을 벗어남으로써 전혀 새로운 장르로 변신한 채 끝을 맺는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영화가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가벼운 코미디처럼 보이던 것이 난데없는 스릴러가 되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김한민 감독의 잠정일 것이며, 힘든 환경에서 연기한 배우들의 공일 것이다.


...

'그 영화 어땠어?' 라는 질문에, 짧게 답하기 곤란한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재미있었다고 해야할까 재미없었다고 해야할까. 잘 만든 영화인건지, 허술한 영화인건지..하나로 딱 몰아세워 평가하기 곤란한 지점들이 있다. 열심히 만들었고,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드는데.. 빈 곳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