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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뷰티풀 선데이 : 용서를 구할 것은 당신의 사랑이 아니다

by 늙은소 2007. 5. 2.

뷰티풀 선데이

감독 진광교

출연 박용우,남궁민,민지혜

개봉 2007.03.29 한국, 117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마약거래가 한창인 범죄현장에 홀로 뛰어들 만큼 배짱 두둑한 강형사(박용우)에게는 몇 년째 깨어나지 않는 아내가 있다. 돌아올 가망이 없는 상대를 기다리는 것은 힘든 싸움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다림만을 대가로 요구하지 않는다. 쌓여만 가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강형사는 범죄조직의 정보원노릇을 하면서까지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다. 강형사의 사랑은 어리석고 자기파괴적이다.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상대를 위해 그는 깨어있는 자신을 너무 많이 소모시킨다.


고시생인 민우(남궁민)는 소박한 짝사랑을 시작한다. 그는 수연(민지혜)이 몇 시에 집을 나서고, 몇 시에 귀가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녀의 꿈이나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의 내부에서 수연은 끝없이 이상화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우와 수연의 첫만남이 성폭행범과 피해자의 관계로 어긋나게 된 것은, 이상화해온 대상과 실제의 그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찾아온다. 그의 사랑은 결국 상대를 파괴시킨다.




[뷰티풀 선데이]의 진광교 감독은 ‘죄의식과 속죄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며 영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영화는 죄의식과 속죄의 문제보다는 ‘맹목적인 사랑의 파괴성’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자신을 파괴시키는 강형사의 사랑과 상대방을 파괴시키는 민우의 사랑은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되고, 영화는 두 사람이 야기한 파괴성이 어떻게 자기 자신과 주변을 파괴해나가는지 보여준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강형사는 생과 사의 상황에 직면하고, 평온하리라 생각했던 민우의 삶 역시 그의 잔인했던 과거가 밝혀지며 살인자의 피로 물든다.


맹목적인 사랑에 있어 힘의 방향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힘의 파괴성이 상대를 향한 민우의 사랑과 자기 자신을 향한 강형사의 사랑이 서로 치환될 수 있는 대립형질이 아닌 까닭이다. 상대를 파괴한 만큼 나를 파괴시킨다면 그것으로 속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랑 이라는 감정이 지닌 함정에 함몰되어 버린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를 닮았으며, 결국 평행선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 두 사람의 삶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변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사랑은 맹목적이어야만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든 타인이든 누군가를 파괴해버릴 만큼 대단한 것이지도 않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덮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선한 동기가 악한 결과로 연결되었을 때, 선한 동기는 정상참작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악한 결과를 모두 감싸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책임’에 대한 물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나의 사랑이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사랑의 결과가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알기에 사랑은 조심스러운 것이며, 신중해야할 덕목이 된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러하던가. 사랑한다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테니 이 사랑을 받아만 달라 외쳐대는 영혼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그 사랑이 더 멀어지게 만드는 어리석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설득력 없는 두 어리석은 주인공에게 또다시 동화되고 만다.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그대들의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인 것을..

...

글을 쓰기 앞서, 해당 영화의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해 꼼꼼히 읽어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이것이다' 라고 써놓은 내용이 영화와 오히려 어긋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서브카피가 아예 '사랑이 용서받는 날'이라고 되어 있어 당황스러웠다. 어찌 그게 사랑일 수 있을까? 그리고 용서라니.. 속죄라니...

과도한 집착이 불러온 파국 정도로 생각했다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을, 속죄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영화 후반부가 힘을 잃고 말았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작 감독이 모르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