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에는 변호사의 활약이 주를 이루는 재판과정이자주 등장한다. 정의감으로다져진 인물이든 닳고 닳은 속물이든 변호사는마지막 최후 변론에서 뛰어난 언변을 자랑하며 배심원단을 설득하고,패배하리라던 예상은 보기좋게 뒤집힌다.
영화의 마지막은 늘 이렇게 끝난다. 재판장을 나서는 변호사를 기자들이 에워싸 플래쉬를 터트리며..
스타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
우리나라는 미국과 다른 법체계를 따르고 있다.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법 체계는 성문법주의로 분류되는데, 특히 독일의 법체계가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법률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영국법의 영향을받아 발전했으며, 불문법의 영향력이 강한 영국법보다오히려더 자유도가 높은쪽으로 발전해왔다.
성문법주의라 해서 모든 법률이 성문법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불문법주의 역시 성문법을 포함하고 있다.
성문법주의와 불문법주의는 명확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법의 체계를 명확히 할 수 있으며 통일된 정비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성문법은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법이 고정적이기 쉬워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고, 유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한 것이 불문법주의로, 각각의 사안을 고려하여 다른 판단을 내리는 등의 유동성과 변화에 대한 적응도가 높다 할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법체계를 견고히 하는 쪽으로 발달해왔다. 일제 치하를 겪은 뒤 독제체제로, 다시 군사정권으로 이동해 온 우리나라 역시 자연스럽게 경직도가 높은 법체계를 수용, 발전시키게 되었다.
유럽 대륙과 달리 영국에서는 절대왕정시기, 왕권이 강화되며 중앙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개별 사안들을 왕이 직접 관여하기에 이르렀고 재판권에 버금가는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불문법주의가 된 영국의 법률은 미국에 영향을 미쳤고, 다민족국가이며 변화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는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측면이 더욱 강화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양성과 특수성을 인정해야만 하는 사회의 특성이 법 체계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변호사의 언변이 재판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재판장의 풍경은 불문법주의인 미국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때로는 이러한 특성이 한 개인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그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용될 가능성도얼마든지 있다. 불문법주의는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불합리성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
'Thank you for Smoking'이 재판에관한영화는 아니다.변호사 출신의로비스트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간을 넓혀본다면그가 활동하는 모든 공간이재판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와 그의 친구들 M.O.D Squad(Merchant Of Death : 죽음의 상인)이 특정 회사에 고용되었다기 보다는 해당하는 제품(총, 술, 담배) 자체를 옹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회사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과 이는 분명 다르다. 그들은 총기와 술, 담배를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이고, 그렇기에 총과 술, 담배가 과연 우리에게 해롭기만 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회피하거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여 오히려 질문한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논의를 흐리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영화는 핵심을 흐리게 함으로써 논의로부터 벗어나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게 만드는 '논쟁의 함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대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내가 옳은 것이 되는 함정.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가능한 세계의 문제도.
설득이 가능한 사회는 그렇기 때문에위험하다.
주인공 닉 네일러는 자신의 아들에게 논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 거의 모든 논쟁에서 성공을 거두는 그의 모습은 통쾌함마저 제공하지만, 한편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함이 없다면 우리는앞으로얼마나 많은 논쟁에서 패배할 것인가.
영화의 매력에 빠져,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주장처럼 '담배는 그렇게 해로운 것이 아닐지도 몰라'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
*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판과정을 보며 예전에는 그들의 방식이 허술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판결이 아닌가 싶어 지나치게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
그러나그런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의식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라야 개선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선지 미국 영화에는 스스로 이런 모순된 체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일깨우려는 영화들이 많은 건 아닌가 싶다.
성문법체계는 합리성을 추구하긴 하지만, 여기에도 모순된 것은 있기 마련이다.'합리적'이라는 인식이 오히려 사람들을 안이하게 만드는 것 같다. 법 뿐 아니라, 사회나 개인도 마찬가지여서.. 견고한 조직이나안정적인 생활은 사람을나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견고한 체계가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견고한 체계에 속한 삶이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듯 하다.
'영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뷰티풀 선데이 : 용서를 구할 것은 당신의 사랑이 아니다 (0) | 2007.05.02 |
---|---|
선샤인 : 절대온도를 향한 태양과의 조우 (2) | 2007.04.25 |
판의 미로 (1) | 2006.12.26 |
The Prestige - 마술의 경계에 대하여 묻다 (2) | 2006.11.11 |
Crash (1) | 2006.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