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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선샤인 : 절대온도를 향한 태양과의 조우

by 늙은소 2007. 4. 25.

선샤인

감독 대니 보일

출연 로즈 번,클리프 커티스,크리스 에반스,트로이 가리티,킬리언 머피,사나다 히로유...

개봉 2007.04.19 영국, 107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선샤인]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태양의 죽음을 가정으로 한 SF 영화이다. 태양에게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곤 한다.
태양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과 불과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태양의 미세한 변화에도 지구의 삶은 큰 파도에 휩쓸리듯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 태양이 서서히 식어가는 현실은 지구 위의 모든 삶을 향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많은 SF영화가 그러했듯 [선샤인] 역시 많은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적인 아름다움은 과학적 오류들을 감쌀 만큼 아름답고 슬프다.


서서히 식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변화는 일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순식간에 상공을 뒤덮은 외계인의 우주선도 아니며, 혜성과의 충돌로 전지구가 파괴되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종말과도 다르다. 몇 십 년에 걸쳐 서서히 차가워지는 대지 속에서 인류 전체는 절망을 짊어진 채 살아왔을 것이며, 다가오는 죽음을 천형(天刑)처럼 여기며 하늘을 올려다봤을 것이다. 죽음이 드리워진 땅에서 태어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라난 젊은이들이 우주로 나아가 자신들의 숙명을 뒤바꾸려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지점이 영화 [선샤인]의 시작이다.

8명의 대원을 실은 이카루스 2호는 식어가는 태양을 다시 살리기 위해 우주로 발사된다. 이미 7년 전 동일한 계획을 품고 떠났던 이카루스 1호의 실패가 그들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따라오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임무완수에의 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 뿐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완벽한 계획은 아니었다. 계획한대로 진행이 된다 할지라도 성공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는 계획, 살아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계획에 그들은 참여한 것이었고 그런 만큼 그들은 죽음에 초연하였다.


[선샤인]의 독특함은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충돌하는 영역은 극히 적은 편이며, 오히려 그 보다는 각자의 철학이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킨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임무 완수를 위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 희생자가 결정된다. 거대한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은 인간의 제 1본능인 생존에의 욕구를 배반하는 행위이다. 선발된 대원들은 임무완수가 무엇보다 최우선임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훈련을 행해왔을 것이다. 삶의 욕구를 억누르고, 가까이 있는 대원 한 명의 목숨보다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전 지구인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과연 손쉬운 일이었을까. 앞서 떠났던 이카루스 1호의 파국은 이런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채 철학적 질문의 함정에 빠짐으로서 발생한 것이었다. 태양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인류의 소멸은 거스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우주의 흐름이다. 인간에게 이를 거부할 권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질문이다.


태양이 지극히 작아 보이기만 하는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나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시야와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거대한 사건이다. 우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몸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 경험이며, 탯줄을 끊듯 지구와 생의 모든 관계들을 잘라내고서야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진부한 질문 같아 보이는 [선샤인]의 질문을 가볍게 받아넘기지 못하는 것은, 떨쳐버리기에는 우주의 무게가 너무 크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 [선샤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SF영화로서 지녀야 할 논리적 전개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이들의 불만과, 스릴러로서의 정당성이 불충분하다는 불만도 있다. 영화로부터 무엇을 볼 것인가에 따라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모두가 태양을 바라보지만 누군가는 소멸해가는 태양으로부터 생의 의지를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생명을 앗아갈 용암의 결정체로 인식하기도 한다. [선샤인]은 때론 과도하였고 때론 부족했지만, 그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로 자신의 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충분히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영화를 보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슬퍼졌다.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는 사실, 영화의 제일 마지막에 잠시 나올 뿐이다. 지구에서의 삶이 어떠했을지,죽음에 대한각자의 생각같은 것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들과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 때문에 슬퍼진다.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는 이카루스 2호의 대원들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결정이 아닌, 어떻게 죽음과 조우하느냐 하는 형태의 결정을.영화의 많은 곳에서 이러한 태도들에경외심을 보이는 대니 보일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생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던 인물조차도 차가운 우주 속에서 부서지며 붉은 보석과 같은 파편을 남기지 않던가.

죽음의 형태를 선택할 권리와 이를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는 영화의 중요한 전제와 모순되고 있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태양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태양에 집착했던 것일까?

...

영화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과도하거나 부족하거나.. 재단하고 싶은 것들이 눈에 거슬리면서도 요즘은 이상하게 웬만한 영화가 다 좋게 느껴지고, 소소한 것들까지 챙겨가며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시기도 가끔은 찾아오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