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충돌'은 자신의 경계를 인식하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세포의 심리적 경계선.
분노와 절망의 한계.
그 외면의 합이 충돌의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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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세포의 심리적 경계선.
분노와 절망의 한계.
그 외면의 합이 충돌의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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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h]는 인종간의 갈등을 주제로 15명의 인물이 어떻게 서로를 향한 폭력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그간 다뤄져 왔던 인종간의 갈등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인종갈등은 이해 가능한 역사적 근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은 망각당한 채, 맹목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왔다. 뿌리가 거세당한 망령과도 같은 존재. 우리는 그 망령에 손쉽게 사로잡혔고, 자신의 편견과 무지, 비겁함을 정당화해왔다.
영화는 그간 다뤄져 왔던 인종간의 갈등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인종갈등은 이해 가능한 역사적 근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은 망각당한 채, 맹목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왔다. 뿌리가 거세당한 망령과도 같은 존재. 우리는 그 망령에 손쉽게 사로잡혔고, 자신의 편견과 무지, 비겁함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Crash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증오에 대한 정당성을 일부나마 소지하고 있다. 뿌리깊은 인종갈등의 맹목성에 중독되어 증오심을 키워나가다기 보다는, 응축된 갈등을 일순간에 폭발시킬 수밖에 없는 현실적 발화요소를 품고 있는 것. 그것은 증오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그리고 분노의 이면에는 늘 공포가 마주앉는다. 그로 인해 절망하고 체념하게 만들어 왔던'케케묵은 인종갈등'과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공격받은 자의 두려움과 그에 뒤따르는 분노를 강하게 전달하려 한다. 타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하고, 공포심에 찬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어리석은 폭력을 행사하게 된 개인을 이해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상호간의 폭력이 화해와 반성의 제스쳐로 보상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려 한다. 마치 9.11 이후의 미국처럼 말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동의를 구하려 한다.
공격받은 자들은 누구나 이럴 수 있는 것이라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을 공격했던 '증오'는 그들이 지금 품고 있는 '분노'와는 다른 것이다. 그들이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방의 '증오'를 무조건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 증오와 분노를 혼동한다는 것.
이것이 치환 가능했던 문제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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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인물들은 동의를 구하려 한다.
공격받은 자들은 누구나 이럴 수 있는 것이라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을 공격했던 '증오'는 그들이 지금 품고 있는 '분노'와는 다른 것이다. 그들이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방의 '증오'를 무조건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 증오와 분노를 혼동한다는 것.
이것이 치환 가능했던 문제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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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건물이 충돌과 함께 사라지던 순간.
그들은 공포의 경계를 확인하였고.. 파편은 경계의 안과 밖에 흩어지며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충돌은 경계를 확인하게 한다. 자칫 충돌이 경계를 창조한 것처럼 오해되곤 하지만, 사실 경계는 늘 그 자리에 있어왔다. 충돌이 생산하는 것은 '상처의 기억' 뿐이다.
그들은 공포의 경계를 확인하였고.. 파편은 경계의 안과 밖에 흩어지며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충돌은 경계를 확인하게 한다. 자칫 충돌이 경계를 창조한 것처럼 오해되곤 하지만, 사실 경계는 늘 그 자리에 있어왔다. 충돌이 생산하는 것은 '상처의 기억'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