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여성적 사극의 범주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암투나 신분상승, 사랑과 운명과 같은 극적 네러티브가 여성성의 상징으로 취급되던 과거와 달리, 섬세함, 미적 기호, 은밀한 시선, 관음증적 태도 등 여성성의 다양한 측면이 사극에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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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주인공 윤서는 지극히 여성적인(우리가 상투적으로 여성적이라 정의해버리는)태도를 취한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배설하고자 하는 남성적 인물이 아니라, 상대를 만족시킴으로써그 과정에서 자기존재의 당위성을 찾아나가는 방식의 삶을 살아간다. 동생의 억울함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나, 어명을 따르기 위해 반대세력에 있는 이광헌을 찾아가는 것은 그가 청렴해서도, 공맹을 따르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추호의 의심 없이 따라야했던 '일부종사'의 규율처럼 자신에게 내려진 삶의 틀을 그대로 순응해왔던 것이다.
김윤서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억압되어 온 여성들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씨받이를 들이겠다는 시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는 여인들처럼 그는 자신을 추궁하는 아버지와 아내, 반대 세력인 좌의정 앞에서 싫은 표정 한 번 내세우지 못한다.
음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변화하는 윤서의 모습은 그렇기에 남편 몰래 바람을 피게 되는 대가집 여인의 모습과 닮았다. 남정네와 살을 섞으며 육체의 쾌락, 그 맛을 알아버리는 원숙한 여인처럼 소설가는 '진맛'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는 수동적인 태도로 상대를 만족시키고, 상대를 흥분시키는 것에 더욱 몰두한다. 온갖 체위를 연구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쾌감을 줄 수 있는가보다는 여성이 무엇을 느끼게 될 것인지, 더불어 그 소설과 그림을 접하게 될 장안의 독자들이 얼마나 흥분하게 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여성적'이라 단정하는 것은 섣부르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적어도 이 영화의 음란함에는 수동적인 태도가 깃들어 있으며, 거기에는 독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모순, 혹은 자신의 성행위를 목격하고 있는 시선을 의식하는 윤서와, 행위에 몰입해야하는 윤서 그 둘의 모순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출증과 관음증이 서로를 관통하듯 작가라는 직업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형상을 이룬다. 욕망과 사랑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작가는 어느 순간 관찰자로서의 나와 관찰되어져야 할 나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많은 경우가 사실 이런 혼란 속에서 어설프게 잉태되기 마련이다. 욕구와 집착, 소유가 사랑으로 불리우는 것 말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정빈과 윤서의 관계는 어딘가 어설픈 게 사실이다. 마치 윤서의 소설이 그러했을 것처럼, 할리퀸 소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설프고도 난데없는 사랑타령이지만 그런데로 그것도 은근히 재미는 있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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