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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눈부신 날에 : 눈부실 게 없는 눈부신 날

by 늙은소 2007. 5. 2.
눈부신 날에

감독 박광수

출연 박신양,서신애

개봉 2007.04.19 한국, 113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우종대(박신양)는 양아치라고 정의하기에는 묘하게 독특한 데가 있는 인물이다. 생계를 이어가는 방식은 일반 양아치와 다를 바 없는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꾸려가는 삶의 모습은 ‘제 멋’에 한껏 빠져있다. 보통의 양아치라면 큰 건 하나 해치워 비참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것을 꿈꿀 것이다. 그런데 우종대는 비닐하우스에서 야채를 키워 식사를 하고, 직접 키우는 닭들로부터 매일 그날의 신선한 달걀을 공급받는 삶을 더 우선시한다. 야바위판 망보기에서 시작해 투견판을 오가며 행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있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밥벌이 수단에 가깝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현재를 긍정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자신의 공간을 사수하는 데 급급한 인물이다.


우종대는 책임질 가족이 없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의무를 다 해야 할 관계들이 없다는 것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런 그에게 낯선 여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딸이 있다’며 함께 지내줄 것을 요구한다. 평상시의 종대였다면 절대 아이가 자신의 삶에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고, 여자가 제시한 조건은 상식적이지 않을 만큼 후한 편이었다. 가족을 만들기는커녕, 조직 내부의 관계조차 거부해온 이 남자가 어린 딸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눈부신 날에]는 박광수 감독이 [이재수의 난]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 영화이다. 그에게는 [칠수와 만수]로 80년대를 관통하였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90년대를 마무리한 역사가 함께한다. 우리의 80년대는,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못한 자의 죄의식이 있으며, 90년대는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태도의 이중성 속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배반하는 감정이 스며있었다. 박광수의 영화에는 그런 시대의 정신을 투과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가 되었다. 박광수 감독의 눈에 비친 우리의 2000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는 붉은 물결과 함께 시작한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대한민국은 온통 붉은 물결로 도배되어 있었고, 모두가 하나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연호하였다. 모든 것이 용서될 것만 같아보이던 하나 된 마음은 그러나 현란한 여름밤 축제였을 뿐, 붉은악마 셔츠 속 개인들은 여전히 개인이었고 ‘제 멋’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개체일 뿐이었다.


주인공인 우종대는 월드컵에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축구를 좋아하고, 아빠와 함께 월드컵 경기장에 가는 것이 소원인 딸 준이(서신애)가 등장한다. 관계를 거부하는 인물과 관계를 추구하는 인물 간의 갈등은, 모진 일을 당하고 무관심 속에 방치되면서까지 아빠를 찾는 딸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승리하며 끝을 맺는다.


[눈부신 날에]는 관계의 회복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다소 진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이다. 진부하다는 것은 새롭지 않다는 것일 뿐, 그것이 거짓이거나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눈부신 날에]의 진부함은 영화적 주제 외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영화를 비롯해 드라마와 각종 CF에 아역배우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아이들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맑다는 것이다. 화면 속 아이들은 자신만의 무기로 어른들을 무장해제 시킨 다음, 그들을 순수함의 영역으로 이끄는 장대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가끔은 어린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떠맡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돌이켜보면 과연 저 나이 때 나는 어떠했던가 싶다. 준이처럼 끝까지 아빠만 찾으며 지저분한 집에서 살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떼 써 봐야 사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길가다 주저앉아 울어댔던 기억이 여럿 떠오르는 것을 보면 현실의 아이들은 [눈부신 날에]의 준이보다 [집으로]의 버릇없는 손자에 가까워야 옳을 것이다. 어른들 조종하려 든다며 조카 걱정하던 언니의 푸념이 떠오른다. 혼자만을 고집하던 종대가 자신의 마당을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이혼 후 어두운 얼굴로 삶을 살아가던 선영이 밝은 미소를 되찾는 일련의 과정들은 준이와 같은 비현실적으로 이상화된 아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의 메시지가 공허한 울림이 되어버릴 정도로, 나는 순수함을 잃은 채 이미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