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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쉬즈 더 맨 : 뻔한 재미와 진부함의 충돌

by 늙은소 2007. 5. 2.

쉬즈 더 맨

감독 앤디 픽맨

출연 아만다 바인즈,채닝 테이텀

개봉 2007.05.03 미국, 104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황미나의 만화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처음 본 것이 20년 전의 일이다. 왕족으로 태어났음에도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야 했던 쌍둥이 남매의 비극적인 운명과 엇갈린 사랑이야기에 한 동안 빠져있었고, 그 감동은 ‘불새의 늪’을 연이어 봄으로써 더욱 배가되었다. 그땐 그랬다. 내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생각이 얕아서인지 몰라도 쌍둥이는 그것이 형제가 됐든 남매가 됐든 모두 똑같이 생겼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해버린 것이다. 쌍둥이 남매는 이란성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때까지 부끄럽게도 그 착각은 몇 년 간 계속되었다.


세익스피어의 희극 ‘십이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장을 하게 된 젊은 여인은 남자 행세를 하며 여성인 자신을 감춘 채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여자임을 모르는 남자주인공은 그녀를 남자로만 대할 뿐이다. 설상가상 남장을 한 그녀에게 반하는 여성까지 등장하니, 한 바탕 소동은 예견된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에서 두 개의 성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여주인공은 사랑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된다. 그녀는 남장을 하였을 때조차 열렬한 구애를 받음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사랑과 남성으로서의 사랑 모두를 거머쥔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니, 인류 전체를 자기편으로 만든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흥미로운 것은 이때 그녀가 연기하는 남자가 보통의 남자들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남장을 한 그녀는, 외부의 남성과 내부의 여성이 하나가 된 존재로 완벽한 연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성들이 늘 느껴왔던 남자들에 대한 불만을 잘 알기에, 그녀는 여자들 앞에서 완벽한 남성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남자들에게는 내부의 여성성을 일깨워주는 친구로 자리 잡게 되며, 속 깊은 얘기를 이끌어냄으로써 주변의 동성 친구들과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 감정들까지 공유하는 위치로 다가서게 된다. 플라톤의 ‘향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향연’에서는, 신들에 버금갈 만큼 완벽한 존재였던 인간이 신의 노여움을 사 그 벌로 몸이 분리되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달리 해석해보면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모든 갈등이 인간을 취약하게 만드는 중요 원인이라는 말이 된다. 왜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 속에서 남장을 한 여자 주인공은 통쾌한 사랑의 승리를 거둔다.

‘십이야’를 현대적으로 바꾼 영화 [쉬즈 더 맨]은 ‘십이야’의 구조만 차용했을 뿐, 이야기의 매력은 전혀 가져오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주인공 바이올라(아만다 바인즈)는 쌍둥이 오빠인 세바스찬이 런던에 간 사이, 오빠가 전학하기로 한 학교에 남장을 하고 들어간다. 그녀의 목적은 축구팀에 들어가 자신을 무시하였던 전 남자 친구 저스틴과 축구시합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바이올라는 자신의 룸메이트인 듀크(채닝 테이텀)를 사랑하게 되고, 듀크는 올리비아(로라 램지)를, 올리비아는 세바스찬으로 변장한 바이올라를 사랑하게 된다. 짝사랑의 물고 물리는 관계와, 남장을 한 채 겪게 되는 남자 기숙사 생활은 다른 영화에서도 익히 보아온 재미를 제공한다. 문제는 남장을 한 바이올라가 만들어낸 세바스찬의 이미지에 있다. [쉬즈 더 맨]의 세바스찬은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마초에 가깝게 행동한다. 남자들 세계에 편입하고, 더 나아가 영웅적인 이미지로 자기잡기 위해 바이올라는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취급하는 농담과 제스처를 반복 구사한다. 바이올라는 여자일 때 사교계 파티와 화려한 드레스를 거부하는 선머슴 같은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써 규격화된 여성성에 반기를 든다. 그녀는 주변에서 강요하는 여자다움을 거부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자신이 남자가 되었을 때, 여성을 이해하는 남자이기보다는 여성들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남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불새의 늪’을 울면서 보던 중학생 시절에는 일란성 남녀 쌍둥이가 가능할 줄 알았다. 가발만 바꿔 쓰면 여자아이가 남자행세를 해도 되었던 것이 그 세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일란성 쌍둥이 남매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발 정도로 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성의 경계는, 남자로 변장을 하고 남자기숙사에 들어가 남자 룸메이트와 같은 방을 쓰고, 남자축구단에 들어가 함께 땀을 흘려도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이 나를 이해하도록 만들 수 없는 견고한 벽과 같다. 그러나 알면서도 상대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가라앉은 기분일 땐 해피앤딩이 분명한 이런 영화를 골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