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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무성영화의 역사성

by 늙은소 2007. 5. 24.

'서울넷페스티벌 2003'은 8월, 태풍을 동반한 빗줄기 속에서 치뤄졌다.

해마다 찾아오는 늦여름의 태풍이 늘 그랬던 것처럼, TV화면은 전국 각지의 수해상황을 알리는 속보로, 창 밖은 빗소리로, 정신은 행여나 피해가 나에게도 미칠까 걱정하느라 소란하다.
이런 소음을 뒤로 하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소리 없는 침묵을 동반자 삼아 영화를 관람하기로 하였다. 보기로 한 영화는 Erich von Stroheim의 <탐욕>(Greed '23)이었다. 소란한 바깥과 달리 지나치게 조용한 극장 안이 오히려 나를 초조하게 하였다. 이는 그저 무성영화의 낯설음때문만은아니었다. 적어도 무성영화가 보편적이던 때에는 세상 그 자체가 덜 시끄러웠으며, '소리'와 '정적' 사이의 화해와 조화의 다양한 방편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

본래 무성영화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긴 시간의 침묵과 고요를 요구하며 상영되지 않았다 한다. 그 시대에도 간단하게나마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었다 하니, 피아노의 즉흥 연주와 함께 감상하도록 한 '2003 서울넷페스티벌'의 무성영화 감상은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기획이라 할 것이다.

극장에 들어서니 관객과 스크린을 나누는 공간의 중앙을 점유한 그랜드 피아노가 보인다. 기대감의 수치는 점점 높은 압력을 향하고 시선은 계속 피아노로 향하게 된다.영화가 시작된 뒤 처음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 소리가 너무 생경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된 음악은 내가 기대한 '무성영화에 적합한 음악'과 분명달랐다.막연하게 기대한 음악과는 분명 다른 스타일의 소리들. 놀라움은 바로 뒤이은 의문들을 촉발시켰다.


'무성영화에 적합한' 음악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될 당시의 시대성을 지녀야 할 것인가?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비롯한 여러 무성영화를볼 때, 내가 들었던 음악은무엇이었던가. 상영될 때 함께 연주되었던음악이 녹음되어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합한 소리들을 선택해 삽입했을 것이다.대체로 내가 보았던 무성영화의 소리들은 당시의 음악을배경에두고 상영되었다.그렇게 한 이들의 판단에는 '시대적 복원'과 '역사적 고증'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넷페스티벌 2003'에서 무성영화는 현대음악과 함께 상영되었다. 영상은 과거의 것이나 소리는 그 영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소리이니 '역사의 재현'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했던 나 같은 관객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기획과정에서 분명 소리의 시대를 어느 지점에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토의가 있었을 것이다. 소리가 현대성을 표출할 때, 과거의 화면은 소리과 함께 '역사적 가치'라는 옷을 벗는다.
짐 지워졌던 무수한 가치들-감독이 헐리웃으로 이동하여 찍었다든가 새롭게 시도된 카메라 앵글이나 여러 특수효과의 신선함 같은-은영화를 내부가 아닌 외부로만 바라보게 한다. 역사 속의 '가치 있는 영화'라는 타이틀이 너무 강할 때, 관객은극장이 아닌 박물관을 찾은 느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감상물로서의 영화가 아닌, 분석물, 연구대상으로서의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시대적 감안과 가치가 무시되어서도 안 될 것이나, 무성영화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이 가치에 전도되어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거리두기가 되는 것 역시 경계해야할 것이다. 즐길 수 있는 마음과 분석하며 보는 눈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그 둘은 늘 함께하기 어려운 존재인 듯 어느 한 쪽이 우선권을 얻어 다른 하나를 지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