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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눈물이 주룩주룩 : 나는 늘 값싼 눈물을 흘린다.

by 늙은소 2007. 5. 27.

눈물이 주룩주룩

감독 도이 노부히로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나가사와 마사미

개봉 2007.05.17 일본, 117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육체는 21그램의 차이를 남기며 삶의 경계를 넘어선다. 영혼을 21그램의 추로 저울질하던 영화가 있었던 것처럼, 눈물에도 무게가 있고 가격이 있다. 눈물의 가격은 누가, 왜, 어디서, 어떻게, 언제, 무엇을 위해 흘렸나와 같은 기준들을 종합하여 평가한다. 마녀는 개구리 눈물을 넣어야만 사랑의 묘약을 만들 수 있고, 공주의 눈물은 저주를 푸는 마지막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진정한 사랑을 증명해주는 눈물 역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데 특효약으로 쓰이곤 하는데, 죽은 이의 얼굴 위에 떨어뜨려야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여 재벌가에서는 이 눈물로 만든 마스크팩으로 얼굴 마사지를 한다는 소문이 종종 들려오기도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다는 영화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눈물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영화라니, 눈동자의 바깥을 눈물로 감싸야만 망막에 상이 맺히는 특수효과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작품일 것이라고 나름 추측해볼 뿐이다.


그렇다. 눈물은 귀하고 비싸고 아름다운 것이며, 기적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왔다. 오죽하면 눈물이 맺힌 듯 보이게 해준다는 눈물렌즈까지 나왔겠는가. 그런데 그 비싸고 귀한 눈물을 시도 때도 없이 흘리는 나는 오늘도 가난하다. 그간 흘린 눈물을 모두 팔았더라면 굶을 걱정 없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 때나 흘리는 눈물은 사주는 이 없어 땅에 떨어질 뿐이다.




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은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픈 영화가 아니다. ‘메칸더 V’와 ‘슈퍼그랑조’를 보다가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입안에 있던 밥알을 콧물과 섞어 쏟아낸 아픔이 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슬픈 영화군’에 넣기 보다는 ‘그럼에도 미소 짓게 하는 영화’쪽으로 분류하고 싶다.


요타로(츠마부키 사토시)와 카오루(나가사와 마사미)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지간이다.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되었으나 행복은 잠시일 뿐, 결국 고아가된다. 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인지, 혹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느낀 외로움 때문인지 요타로는 여동생에게 헌신적인 오빠로 성장한다. 잠시 떨어져 있던 남매는 카오루의 고등학교 입학으로 다시 재회하게 되고, 그렇게 영화는 오키나와의 바다 위에서 시작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양 영화 포스터는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의 감정은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카오루와 아직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요타로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는 삶이 너무 힘겨웠고, 그 무게를 함께 나누기에는 서로를 너무 아꼈던 것이다.


요타로는 어머니에게 눈물을 참는 법을 배우고, 어머니가 돌아가진 뒤 여동생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눈물을 참기 위해 코를 꼭 쥐는 행동은 요타로와 카오루가 ‘가족’임을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웃는 표정이 닮았고, 울 때의 모습이 똑같은 그들은 이런 상징들을 통해 남매로서의 관계를 확인하는 한편, 남매가 아닌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감추곤 한다. 오빠에게 배운 눈물 참는 법은 결국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참지 않는 눈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숨겨왔던 감정을 터트리는 행위이며 동시에 남매의 표식을 벗는 과정이기도 하다. [눈물이 주룩주룩]은 관객에게 많이 울어주십사 부탁하는 제목이 아니라, 두 주인공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내 눈물이 염가판매의 수모를 겪고도 팔리지 않는 것은, 카오루처럼 참고 참다 마침내 흘리는 눈물이 아닌 까닭이다. 오래된 술이 맛이 깊고, 100년이 넘으면 더덕도 산삼만큼 효력이 높아진다 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눈물 역시 인내의 끝에서 맺혀야만 가치가 보장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리기만 하는 영화가 반드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종 많은 영화 홍보물들은 어두운 극장 안에서 눈물을 닦는 관객을 포착하여 내보임으로써 눈물은 곧 감동이라는 명제를 강요한다. 얼마나 많은 관객이 울었는가가 영화의 감동지수가 되고, 몇 분 만에 눈물을 흘리는가가 연기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다이아몬드가 비싼 것은높은 압력 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스스로를 굳혀온 역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다이아몬드가 비싸기 때문에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 눈물도 마찬가지다. 눈물은 감동의 결과일 수도 있고, 고통의 결과일 수도 있다. 눈물은 다양한 원인들로부터 비롯된 결과일 뿐, 눈물 자체가 무엇을 정의하거나 증명하지는 못한다. [눈물이 주룩주룩]은 눈물에게 너무 많은 말을 시킨다. 조금만 덜 흘렸어도 좋았을 것을 ‘주룩주룩’까지는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