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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리 앙투아네트 :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 여인

by 늙은소 2007. 5. 18.

마리 앙투아네트

감독 소피아 코폴라

출연 커스틴 던스트,제이슨 슈왈츠먼,립 톤

개봉 2007.05.17 미국,일본,프랑스, 122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역사상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유명한 왕비는 없을 것이다. 교과과정에서 만나기 전부터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그녀를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어리고 귀여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기도 하였다. 내 경우는 TV 만화로 본 ‘플로네의 모험’이 처음이었다.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인 이 만화는, ‘빨간 꽃잎 머리 꽂은 예쁜 소녀 플로네’라는 가사로 시작된 노래가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 크게 유행하며 고무줄놀이로까지 만들어졌었다. 만화에서 소개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강렬했다. 오스트리아 공주인 마리는 14살에 프랑스 왕태자비가 되는데, 걸치고 있던 모든 의상을 벗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상황임에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되었다.


제대로 된 평전을 읽지 않은 이상, 역사적 인물의 상당수는 이렇게 간접적인 인상으로만 구축되기 마련이다. 장보고를 드라마를 통해 먼저 알게 된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장보고를 접할 때마다 검투사 장보고, 노예 장보고를 우선 떠올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만화나 영화 속의 이미지로만 정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프랑스 혁명을 야기한 주범으로 종종 지목되는 그녀. 그 이미지는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작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로도 잘 알려진 ‘소피아 코폴라’감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새로운 모습을 시각화하기 위해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책을 원작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현재의 10대 감성으로 접근한다. 프레이저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그녀의 실제 모습을 밝히기 위해 관련 서적과 비공개 문서들까지 두루 검토하여 800여장이 넘는 두꺼운 책으로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략결혼의 수단을 위해 교육되어 온 공주들의 운명은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인질로서의 역할과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외교대사로서의 두 가지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밝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국내외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하였던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난다. 루이 14세 시기에 절정을 맞이하였던 프랑스 궁정은 성적으로 문란하였던 루이 15세에 이르러 서서히 그 세력이 기울어가고 있었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루이 16세에 이르러 경제적 파탄을 맞게 된다. 쇠망하는 권력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들은 자신의 쇠락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힘을 과시하기 위해 외적인 것에 더욱 힘을 쏟았다. 프랑스 궁정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얕잡아 보려한 데에는 이런 심리 역시 작용한다.


영화는 결혼 이후 임신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력 속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집중한다. 오스트리아의 황녀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혼당할 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남편과의 잠자리를 어떻게든 이루어내려고 노력해야했다.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구속받아야만 하는 삶. 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그녀는 겉치장과 도박, 오페라와 같은 것들로부터 위안 받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10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이다. 미국의 많은 10대들은 안정된 생활 속에서도 공허함을 느끼며 약물에 빠져 삶을 허비하곤 한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경쾌한 락음악으로 시작되는 독특한 시대극이다. 클래식 음악과 모던락이 교대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캐스팅에서부터 커스틴 던스트라는, 지극히 현대적이며 평범한 이미지의 여배우를 기용함으로써 역사 속의 귀족적인 삶보다는 그녀를 통해 현재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느끼게 하려 노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에도 그랬으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후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는 마차에서도 그러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한 듯, 애잔한 그리움을 언뜻 내비치곤 하였다. 언제나 그녀는 정들었던 것을 포기해야 했다. 다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이지만, 실제의 삶은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구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왕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이 더 나은 삶일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기 위해 집착하고 싶은 그리움들을 쉽게 잘라내는 삶과, 구걸할지언정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는 삶 중.

...


재미있는 영화도, 좋은 영화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난 그녀가 마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잠시의 서늘한 표정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류층의 삶이 언뜻 느껴졌다고 할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아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에 '가까운' 만큼만 가질 수 있다. 거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조건, 그 훌륭한 조건 때문에 그들은 가지기 힘든 것을 가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만다. 포기가 쉬워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댓가가 너무 비싸기에.. 포기를 택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잃는다'는 말은 똑같이 사용할 수 있어도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잃는 것이고,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잃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의 포기는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