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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밀양 :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by 늙은소 2007. 6. 4.

밀양

감독 이창동

출연 전도연,송강호

개봉 2007.05.23 한국, 141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로또판매가 막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복권을 샀고 월요일이면주말을 휩쓸고 간 복권 후일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번호 4개가 맞았다는 김대리는 아슬아슬하게 1등을 놓쳤다며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영웅담이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에 떠벌리느라 정신없었다. 나는 그들을 은근히 비웃으며 복권 광풍에 휩쓸리기를 거부했지만, 그 의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몇 년째 복학을 미루며 회사에 다니다 결국 사표를 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5평 남짓한 방에는 일 년 내내 빛이 들지 않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방안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복권을 샀고, 번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조심스레 표시를 하였다. 이제껏 살며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태어난 날짜라든가 현재의 나이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숫자들을 포함해 6개의 번호를 뽑아냈다. 그 숫자들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당연함을 입증해주는 증거와 같았다. 주민등록번호가 태어난 날짜를 기준으로 개인을 정의하는 표식이라면, 내가 복권에 표시한 숫자들은 짧지 않은 삶에서 겪은 힘겨운 순간들을 기록한 나만의 표식이었다. 힘들게 살아온 만큼 그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복권을 보며 생각했다.


복권은 나를 미신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복권을 사고 난 후면 주위의 모든 현상이 복권 당첨을 암시하는 상징들로 여겨진다. 불운은 당첨의 행운을 상쇄시키기 위한 전조로 느껴졌으며, 행운은 복권당첨의 약속을 확인시켜주는 절차로 생각되었다. 나는 정말로 미신적이 되어 한 주를 설레임 속에서 보냈고, 그 떨림은 토요일 저녁까지 이어졌다.




살면서 몇 번 ‘계속 살아야만 하나’를 놓고 힘들어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를 읽고, 뜬금없이 법의학 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절박한 이유가 숨을 조여 왔지만, 사실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은 당면한 문제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궁지에 몰리고서야 내가 운명론자처럼 생각하여 살았음을 깨달았다. 끔직한 사고로 장애인이 된다든가, 가까운 이를 허무하게 잃는 것 같은 이야기들은 내 것이 아닐 것만 같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착각은 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세상이 나를 거부하고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양 고약하게 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잔인했다. 나는 신이든 운명이든 ‘정의로움’을 주관하는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하고 말았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정의로움’을 주관하는 존재가 세상에 있음을 믿으며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든가, 아니면 애초에 그런 존재란 없다며 허무주의로 빠지든가.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녀는 이미 힘든 시간을 견뎌낸 뒤였다. 친정 식구들과의 불화, 죽은 남편과의 갈등. 숨겨진 이야기에서도 신애는 여러 개의 짐을 겪어낸 뒤였다. 작은 말 한 마디도 순식간에 퍼져버리는 작은 고장에서 신애의 등장은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녀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표적의 대상이 된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대화 소재로, 종교적 열정에 불타오르는 약사에게는 전도의 대상으로, 그리고 돈이 절박한 유괴범에게는 돈을 뜯어낼 대상으로.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신애는 한계를 넘어 선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그녀가 마주한 고통은 안개 자욱한 숲 속의 미로와 같은 것이어서, 그저 허우적거릴 뿐 방향을 찾지 못해 길을 잃고 마는 고통이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비극적 운명의 처절함은 그녀를 긴 악몽 속으로 끌어들인다. 분노에 자책이 뒤섞이고, 범인을 향한 증오는 공포로 뒤범벅된다. 결국 신애는 ‘신의 뜻’이라는 정의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범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향한 책망을 분리하고, 죄의식을 신의 뜻으로 대체함으로써 신애는 비로소 살아갈 의지를 표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의지는 범인과의 만남으로 좌초되고 만다. 힘겹게 지탱해오던 대상을 범인에게 빼앗긴 신애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며 신에게 대적하려 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된다.




신애는 이유를 묻는 여자이다. 밀양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종찬(송강호)에게 물어보던 그녀는,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밀양을 택한다. 마음으로만 용서해도 될 것을 찾아가 말로 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그녀는,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아 자기 자신에게 이를 내보임으로써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여자이다. 살아야 할 이유, 용서해야 할 이유, 믿어야 할 이유... 신애는 늘 이유를 필요로 했다. 반면 신애와 대척점을 이루는 종찬은 무거운 영화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작용한다. 그는 답을 필요치 않는 남자다. 자신이 왜 신애를 따라다니는지, 교회를 왜 계속 다니는지, 밀양이 어떤 곳인지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그냥 사는 것이고, 밀양은 다 같은 도시일 뿐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두 개의 서로 다른 삶의 태도는 서로를 의지하며 햇빛 아래 마주한다.


나 역시 늘 이유를 필요로 했다. 복권을 사놓고는 모든 현상을 복권의 당첨결과에 끼워 맞춰 해석하고, 갑작스레 닥친 불행을 운명의 필연적 결과물로 생각하여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들곤 하였다. 온갖 것에 이유를 붙이며 이성적인 양 잘난 척 하지만, 그 표피가 얇아 작은 충격에도 쉽게 상처입곤 하였다.


신애는 죽음을 체험한 연후에야 비로소 생의 의지를 확인한다. 피를 뚝뚝 흘리며 살려달라던 그녀의 절박한 외침은 지연되었던 감정의 응축과도 같았다. 죽은 아들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지 못하였던 그녀, 범인 앞에서 죽일 놈이라며 달려들지 못한 그녀, 아들 손자 잡아먹은 년이라는 시어머니 앞에서 항변하지 못한 그녀. 이유를 찾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감정을 지연시킨 탓에, 감정의 늦은 폭발을 경험하곤 한다. 그때마다 종찬은 그녀가 미처 내보이지 못한 감정을 대신 표출하는 출구 역할을 한다. 마침내 그녀는 제 때 화내는 법을 배우고 조금은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잠시 미쳤었던 자신을 긍정하며 멋쩍게 웃고는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신애는 부쩍 자란 머리카락을 자른다.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끝내 죽음을 택한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신애에게 ‘그럼에도 살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때로 삶은 종찬의 말처럼 ‘그냥 살지예’로 답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밀양]은 내게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