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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카핑베토벤 :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by 늙은소 2007. 10. 21.

카핑 베토벤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출연 에드 해리스,다이앤 크루거

개봉 2007.10.11 미국,독일, 103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의 아동기를 나는 답십리에서 보냈다. 20년 넘게 그 곳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변화가 빠른 서울'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해왔다. 당시에도 서울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가난해보이던 동네는 몇 년 전 찾아갔을 때, 그 격차가 더욱 커져 마치 드라마 촬영을 위해 복원해 둔 과거의 도시처럼 남아있었다.


그 시절 내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과외가 금지되자 교육열을 해소할 데 없어진 부모들은 자녀에게 태권도나 주산, 피아노 같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특히 피아노 교육 열기가 대단했는데,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피아노 학원에서 건반을 두드리며 10대를 맞이했다. 답십리 미주극장 주변 변두리에도 피아노 학원이 들어섰다. 비록 음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가씨들이 차린 피아노 학원이었지만 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동네 여자아이들을 유혹하였고, 뒤틀린 음정과 소리 나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며 모두가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시절이 찾아왔다.


학원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이미 피아노를 조금 칠 수 있는 아이였었다. 바로 일 년 전 홍역을 크게 앓아 병원신세를 졌던 나는 병원의 의사선생님에게 제법 애교를 떤 결과, 그 집에서 의사 선생님의 딸들과 어울리며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나름의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상대음감을 7살 나이에 얻게 되었고, 더 이상 절대음감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비운의 아마추어가 되고 말았다.




음감은 그것이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피곤한 것임에 틀림없다. 상대음감인 나는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의 계이름이 바로 떠오르는데, 해당 음의 실제 높이를 알지 못한 탓에 모든 음악을 다장조(혹은 다단조)로 조바꿈한 상태에서 계이름으로 노래를 하게 된다. 노래가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더불어 가사를 외우지 못하는 것도 다 상대음감 때문이며, 결국 노래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음악을 들으면 집중력이 분산되어 책조차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음악은 그것을 좋아하는 단계일 때가 행복한 것 같다. 음악을 분석하여 각 악기의 소리와 화음의 진행을 가릴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음악을 듣는 것은 더 이상 휴식이 되지 않는다. 내 경우 음악을 외우지 않으려 애쓰면서 최대한 흘려들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같은 곡을 외우게 되면 잠자리에 누워 피아노 협주곡의 피아노 파트와 교향악단 파트의 진행을 계이름으로 부르며 한 시간 동안 괴로워해야 한다.


베토벤은 말년에 청력을 읽은 상태에서 작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외부의 소리가 사라진 대신 그는 내부의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비극을 '자신의 음악을 직접 듣지 못하는' 데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베토벤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음악을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보다는 머릿속의 소리들을 잠재워줄 휴식, 외부의 소음과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방해가 사라진 것이 그에겐 비극이지 않았을까 싶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음악소리가 들린다면 심지어 그 안에서 교향곡을 작곡하는 상황이라면, 멈추지 않는 내부 소리들의 침공을 그는 어찌 감당했을 것인가.

[카핑베토벤]은 베토벤이 마지막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의 상황을 가공의 인물 '안나 홀츠'의 시각으로 조명해 본 영화이다.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애드 헤리스)은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교향곡 초연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는 베토벤이 작곡한 악보를 연주 가능한 형태로 다듬고 정리하는 카피스트로 그와 만나게 된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간파한 베토벤은 안나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음악적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괴팍한 성격 탓에 그의 의도는 안나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문제의 시작이었던 교향곡 9번 '합창'의 성공적인 초연과 함께 영화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금 다른 형태를 취한다. 신의 소리에 다가가려 한 베토벤은 '합창'을 통해 음악의 절대성을 표현한 이후,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혁신적인 음악은 주변으로부터 외면당하는데 사실 그 음악들은 이미 미래의 음악과 맞닿아 있었다. 결국 영화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하는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 보이다가, 베토벤 이후의 음악이 베토벤과 어떻게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로 뒤바뀌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토벤이 아니라, 안나 홀츠라는 상징(베토벤 이후, 그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음악가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중반까지 이끌고 있는 음악이 '합창'이라면 후반부를 이끄는 것은 작품번호 133의 '대 푸가'이다. 이 곡은 실험적이며 난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한때 고전파였으며 이후 낭만파였던 베토벤이 자신의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곡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시대는 19세기, 시민사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 시기 가장 조화로운 음을 찾아 수학적 비례에 의해 탄생된 음계는 그 단점을 보완하며 화성적 조율(순정율)을 거쳐 다시 평균율로 바뀌었고, 그 결과 각 음 간의 간격이 동등한 값을 갖게 되었다. 7개의 음을 중시하던 온음계 체계에서는 정수 비례의 음 사이의 완벽한 화음(진동수 간의 수학적 비례를 통한 물리적 화음)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12개의 음을 모두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한 평균율의 세계에서는 무리수의 간격으로 음이 재배치되는 까닭에 불완전한 화음을 생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반음의 무게가 커지는 것, 신의 소리와도 같았던 정수비례의 음들이 사라진 세계는 불안정하지만 그 대신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의 진행과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화음들(비록 그것이 불협화음일지라도)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였던 시민의 성장은 장식을 위한 꾸밈음으로 쓰이던 반음들의 부각과 일치한다. 도와 미, 도와 솔만이 가장 조화로운 화음이라던 과거의 생각들은 어울리지 않는 것끼리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시민과 귀족, 남자와 여자와 같은 경계를 허물게 된다. [카핑베토벤]의 안나 홀츠가 광부인 아버지를 둔 여성 작곡가라는 설정은 그녀의 신분을 통해 변화된 세상과 변화하는 음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목적과 부합되고 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곡의 마지막 악장은 위의 문장을 모티브로 작곡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 문장으로부터 '가벼움'과 '무거움'을 이야기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베토벤의 음악은 교향곡 9번에서 한 없이 가벼워지고 신의 높이를 향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내려와 스스로 무거워진다. [카핑 베토벤]의 시작,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안나 홀츠가 바라본 풍경의 들판은 가난한 농민들과 바이올린을 켜는 사내아이의 남루한 옷차림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이 5분을 위해 2시간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