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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식객 : 영화 속 요리천재는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가

by 늙은소 2007. 11. 4.

식객

감독 전윤수

출연 김강우,임원희,이하나

개봉 2007.11.01 한국, 113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천재가 등장하는 영화는 많다. [굿 윌 헌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실존했던 많은 천재들이 스크린 안에서 되살아났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가공의 인물이 천재라는 정의 하에 창조되었다. 음악의 천재는 한 번 들은 음악을 완벽히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였고, 수학의 천재는 어떤 수학자도 풀지 못한다는 난제를 풀어냄으로써 천재 직위를 수여받았다. 알아서 뭐 할까 싶은 길고도 복잡한 숫자를 달달 외우면 기억력의 천재가 되고, 시나리오에 친절하게 자국어로 써 있었을 게 분명한 몇 개의 문장을, 해당 언어권 사람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발음으로 말함으로써 어떤 이는 단번에 10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천재를 만드는 방식은 대체로 위와 같다. 그러나 저 방식으로도 주인공이 천재임을 증명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으니, 미술이나 문학 같은 분야가 바로 그렇다. 음악과 달리 미술에서는 한 번 본 대상을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천재가 되지 않는다. 재현은 변두리 화실에서 몇 달 수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취 가능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보이저호가 지구를 떠나 멀어진 거리만큼, 미술은 얼마나 똑같은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다.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큐비즘, 다다이즘을 거쳐 이제는 미술 스스로도 자신이 어디에 와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몇 개의 이미지만으로 주인공이 미술의 천재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영화는 주인공의 그림을 놓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제 3의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주인공이 천재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문학계의 천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역시 그랬다. 이 영화에는 천재성을 입증해줄 결과물인 주인공의 글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글을 읽은 후 감탄하는 전문가의 표정과 대사를 통해 주인공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방식을 취한다. 감독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글을 관객에게 보여줬다가 '난 저 글이 좋은지 모르겠는 걸'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문학이나 미술에서 재능이라고 일컫는 부분은 대체로 창조성에 기인한다. 이 동네는 과거의 유명한 작품을 재해석하여 발표하거나 차용하여 뒤트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되 그 안에 새로운 시각과 철학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반면 음악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이 고장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천재 그룹이 존재한다. 한 쪽에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무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과거의 음악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해내는 무리가 있다. 전자가 창조를 중점에 둔다면 후자는 해석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리는 어떤가?


요리의 천재는 영화보다 만화 속 주인공으로 더 친숙한데, TV로 본 '요리 왕 비룡'을 비롯하여 '맛의 달인', '따끈따끈 베이커리' 등이 언뜻 떠오른다. (밝히자면 난 아직 허영만 씨의 '식객'을 만화로 보지 못하였다)


만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으로 먹으면 누구나 감탄하게 되는 음식을 매 에피소드마다 만들어내곤 하였다. 요리의 천재는 역시 '맛있는 음식을 만들 것'을 기본 전제로 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화나 영화에서 그 천재성을 입증하기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관객에게 직접 맛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극대화된 요리의 시각적 측면과, 제 3자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감탄의 지속만이 요리천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누가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판단으로 이를 계량 가능한 수치로 환산하거나 절대적 미각의 기준을 들어 평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요리 천재는 진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조합을 찾아 기존의 요리법을 뒤엎는 혁신을 감행하고 창조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빵 사이에 자장면 소스를 바른다든가, 국수 면발 안에 실처럼 가느다란 도미살이 박혀있는 식의 다소 황당한 요리법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요리가 과연 정말 맛있는 요리인가 하는 리얼리티의 문제와, 지금껏 없던 새로운, 그러면서도 누구나 감탄할 만한 요리를 영화를 위해 개발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 이 과정에서 요리사의 천재성은 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요리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겠다는 것.

결국 요리계의 천재는 '기술>맛>창조>철학' 의 단계를 밟으며 진화한다. 이것은 요리를 주제로 한 만화가 걸어온 길이며, 50, 60권을 넘어서며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어진 요리 만화가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걸어온 길과도 일치한다.




이제 영화 [식객]이다.

이 영화의 요리 천재 '성찬'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최고라는 운암정에 어린나이로 들어온 성찬은 그 때 이미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맛 또한 일품인 천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창조'와 '철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영화 [식객]은 이러한 수순을 밟지 않는다.


많은 요리 만화가 대결구도로 진행되는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시련을 부여하고 라이벌을 통해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쇠를 강하게 단련하기 위해 필요한 반복된 담금질처럼, 시합이라는 소재는 주인공을 더욱 강하게 몰아붙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식객]의 요리대회는 '성찬'을 성장하게 하는 자극이기보다는 그의 능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성찬'은 이미 요리의 철학을 지니고 있으며, 다만 억울한 누명으로 재야에 묻혀있던 완성된 천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주인공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의 성장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방향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맛은 조금 싱겁다. 완벽한 천재인 주인공으로 인해 라이벌의 무게는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팽팽하기 보다는 한 쪽의 일방적인 치졸함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기술과 맛을 중시하는 파와 철학과 깊이를 강조하는 파의 대등한 대립일 수도 있었던 영화는 결국 천재의 누명 벗기로 싱겁게 끝나고 만다. 그리고 이 구도는 억울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일본으로부터 사과받기 제스처와 맞물리며 반복되는데, 그것이 통쾌하기보다는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영화의 대미, 성찬의 최종 승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인물이 일본인이라는 것, 일본인으로부터 오히려 우리가 가르침을 받고 깨우침을 받도록 한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미녀들의 수다'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보려하고, 외신으로부터 한국의 위상을 평가받으려는 여전한 컴플렉스로 여겨져 끝 맛이 영 개운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