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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미스트 : 몇 가지 관점을 추가하며

by 늙은소 2008. 9. 18.

미스트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출연 토마스 제인,마샤 가이 하든,로리 홀든,안드레 브라우퍼,토비 존스,윌리암 새들러...

개봉 2008.01.10 미국, 125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스포일러성 글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 혹은 볼 예정 없는 분 or 결과를 다 알아도 상관없는 분만 읽으세요.

번개가 내리치는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 사내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림 속의 남자는 홀로 서 있는 총잡이이며 서부영화에서 익히 보아 온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왼쪽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들판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번개가 내리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직감하게 한다.
홀로 싸우는 남자(홀로 서 있는 나무)의 수난기.

다음 날, 데이비드 드레이튼(토마스 제인)은 마당에 있던 나무가 뿌리 채 뽑혀 작업실 창문을 부수고 침입한 사실을 알게 된다. 밤새 그리던 그림은 엉망이 되고, 이웃집의 나무까지 날아와 보트 선착장은 부서져 있다. 그는 아내를 남겨둔 채 아들을 데리고 시내에 나가 필요한 물품을 사오기로 하고, 이웃인 노튼과 동행한다. 폭풍우로 통신은 두절되었고 전기 공급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형마트는 식품을 보관하기 위한 예비전력이 남아있는 상황.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은 안부를 묻고, 낯선 외지인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과 경계의 눈빛을 건네기도 한다. 평소 과도한 신앙심의 표출로 이웃의 냉소를 받아야 했던 카모디 부인(마샤 가이 하든) 역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사야할 물건을 계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그때 싸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마을 노인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안개 속에 무엇인가 있다고 소리치며 마트 안으로 황급히 달려들어 온다. 아침부터 호수 위를 덮고 있던 짙은 안개는 서서히 움직이며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고, 어느 사이엔가 마트는 안개로 뒤덮이고 만다.



생을 유지하기 위한 서로 다른 태도들

안개 속에 무엇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안개는 공포의 편재(遍在)성을 완성시킨다. 마트를 둘러싼 짙은 안개는 바깥을 관찰할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를 향한 시야의 기능을 박탈한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마트 내부만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공간인, 사각의 마트가 세계의 전부인양 사고를 축소시켜버린다. 이렇게 안개는 공간과 이성의 고립을 결정한다. 또한 안개는 시간의(미래에 대한) 고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상황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괴물의 존재를 확인한 후에도 이들은 이해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고립이 자신들에게 국한된 것인지,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인지, 더 나아가 인류의 파멸이 다가온 것인지 예측할 만한 단서는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살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지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각기 다르게 파악한다. 이것은 괴물의 존재 유무나, 혹은 그것이 신이 보낸 징벌의 징후인가 아닌가와 같은 현상에 대한 이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가’, ‘가능성이 있다면 어떠한 형태의 생존유지 전략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선택을 취하게 되면서 마트 안의 세계는 분열을 시작한다.

[미스트]에는 많은 자살 장면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미 안개에 둘러싸이는 순간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을 예감한다. 그러나 자신이 맞이하게 될 '죽음의 방식'에 동의하지 못하기에 자살을 택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는 것. 허리가 잘리거나, 시신이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거나, 벌레의 알을 품은 채 고통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 같은 ‘죽음의 형태’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 자체를 압도하기에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반면 삶을 택하는 이들에도 여러 부류가 등장한다. 하나는 당장의 죽음을 지연시킴으로써 삶을 연장하려는 태도인데, 이는 구조의 희망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된다. 카모디 부인이 세계의 종말을 경고하는 것과 달리,그녀의 편에 선 사람들은 ‘당장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희생자를 찾아내 그를 처단하는 과정을 밟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든다.

고립된 마트는 하나의 세계이다. 자원은 한정되고 있고,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 역시 확정되어 있다. 구조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이들은 최대한 삶을 연장시키기 위한 산술을 해야만 한다. 괴물의 공격으로부터 마트(은신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과, 한정된 자원을 함께 나누어 쓰기 위한 최대한의 인원에 대하여. 두 개의 그래프가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마트에 남아야 할 사람의 숫자다. 이들이 종교적 이유와 신념의 차이, 인종과 연고를 놓고 갈등하며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마트 내부의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이다. 생존의 원칙 하에서라면 전신화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거나, 그를 위해 약국을 다녀오는 것 같은 위험부담을 감행하는 일은 오히려 전체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가 된다. 마트 바깥으로 나갈 용기는 없으나 자살하지 않고 마트 안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택하는 합리성은 윤리적인 태도를 앞세우는 드레이튼의 그룹과 대치한다. 결국 [미스트]는 다수의 안전한 이익을 앞세우는 그룹과 윤리적 판단을 우선하는 그룹간의 싸움이 되는데, 당황스럽게도 보통의 영화가 후자의 편을 드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드레이튼은 자신이 구하려던 사람 모두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얻고 만다.

카모디 부인은 원시종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재현하며 마트 내부에서 권력을 획득해나간다. (그녀는 이미 기독교인이 아니며, 원시종교의 제사장에 가깝다) 사람들은 ‘집단화를 통한 인구 수 줄이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좋은 공약을 제시하는가, 그리고 그 공약이 자신에게 유리한가, 더불어 누가 더 세력이 큰가와 같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익에 있다. 여기에 카모디 부인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 대한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괴물이 무작위로 사람을 공격하는 것 보다는, 신의 대리인이며 선과 악, 믿음의 여부를 판별해 희생자를 선별한다고 믿는 편이 공포를 극복하기 더 수월하며, 살기 위한 행동지침을 세우기에도 편리한 탓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은 살아남는다’는 확신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처참하게 죽느니 바로 자살을 택할 것이다.) 선택받은 존재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람들이 ‘죽음이 예정된 존재’로 설정하는 게 필요하다. 이들이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반복하며 ‘희생자’를 찾는 것은 괴물을 숭배하고 그를 잠재우기 위해서도, 상황의 책임자를 찾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죽어야 할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반대급부로 ‘살아야 할 사람’이 존재하리라는 단순한 원리가 이들을 지배할 뿐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혹은 각 항의 대립관계로 보기

[미스트]의 사건은 두 가지 현상이 중첩되며 일어난다. 한 밤 중의 폭풍과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실험의 실패. 물론 실험의 실패로 폭풍이 발생하였을 수도 있고, 폭풍이 실험에 영향을 끼쳐 실패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실험명은 화살촉(Arrowhead) 프로젝트이며, 그 결과 다른 차원의 문(혹은 막)이 열린다. 폭풍우 치던 밤 드레이튼의 작업실은 나무가 창문을 뚫고 집안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화살촉은 세계의 막을 찢고, 나무는 창을 뚫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괴물(아들)이 튀어나와 어머니의 막을 파괴한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튀어나온 괴물이 인간을 사로잡아 자신의 알을 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이때 괴물은 남성, 인류는 임신한 여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다시 새로운 대응관계를 그려보자. 드레이튼-괴물-총-번개와 대립하는 대상으로 드레이튼의 아내와 그가 호감을 느끼는 아만다, 카모디 부인을 위치시킨다면?

드레이튼은 결국 자신의 아들 빌리와 빌리를 돌봐주던 아만다, 그리고 두 명의 노인(댄과 이렌느)만을 구해 자신의 차에 태우고 마트를 빠져나간다. 이것은 가족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로 구성된) 이들 중 진짜 가족은 드레이튼과 빌리 뿐이다. 영화 초,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겠다며 마트를 뛰쳐나간 여인이 도움을 구하였을 때 드레이튼은 이를 외면하였음은 물론이며 집에 홀로 있는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창을 뚫고 들어온 나무로 인해 아내가 안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다) 그가 지난 밤 그리던 그림 속의 남자는 홀로 서 있는 서부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영웅행세를 하지만 결국 혼자인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갈망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드레이튼은 결국 자신이 구한 유사가족 전원을 안락사 시키고 혼자 살아남아 절규한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가족의 해체와 여성성을 파괴하는 남성성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영웅주의에 빠진 남성의 자멸로-그렇다면 드레이튼은 포스트 911에 대한 미국의 징후인가?)

혹은 또 다른 구조. 드레이튼의 집을 파괴한 나무는 그의 (할)아버지가 심은 것이며, 이 공격은 결국 그의 가족이 흩어지고 파괴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드레이튼은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인다. 자신의 아들을 공격하고 죽이는 아버지의 관계가 반복하며 등장하는 것은 왜일까?

[미스트]에는 여러 개의 대립관계가 등장한다. 드레이튼은 괴물, 안개, 가족, 카모디부인, 여인(아이를 구하러 간)과 대립을 이루고 있다. 그가 승리하는 것은 이 대립관계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마트 밖으로 나간 것은 카모디 부인과의 권력싸움에 실패한 후 마트를 장악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드레이튼은 가족을 형성하고 파괴당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침범한 나무가 혈연관계인 가족을 파괴하였다면, 마트 전체를 주도함으로써 집단을 이끌던 범가족주의는 카모디부인에 의해 파괴당하고, 다시 마트를 빠져나오며 형성한 유사가족은 자신의 손으로 파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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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는 흥미로운 시각이 끊임없이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이다. 이미 정성일씨가 씨네21을 통해 7가지 관점을 제시할 만큼. 그러나 각각의 상징이 대등하게 대립하며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관점은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와, 드레이튼의 심리(무의식적인 영역까지 추리해가며)에 어떤 가설을 세울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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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지금 좀 많이 아픕니다. 추석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어제부터는 심한 두통을 동반한 체온상승이 있어.. 몸살감기려니 하고 집에 있던 감기약을 먹었는데.. 새벽부터 흉통, 오한, 발열(체온 지금 38도).. 등쪽 척추 라인 따라 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두바이러스에 의한 대상포진이 아닐까 의심 중입니다. (물론 제가 의사는 아니죠.ㅎㅎ)
잠도 잘 수 없고, 병원은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니고, 이 정도로 응급실 까지 갈 건 아닌 듯 하여 버티며 글을 썼더니... 글이좀 이상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9시가 되어야 병원에 갈텐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