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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월-E : 모순된 세계를 지향(志向)하며

by 늙은소 2008. 8. 31.

월-E

감독 앤드류 스탠튼

출연 벤 버트,엘리사 나이트,제프 가린,프레드 윌러드,존 라첸버거,캐시 나지미,시고니...

개봉 2008.08.06 미국, 104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인류가 배출한 각종 폐기물을 사각 블록으로 압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월-E'는, 인류가 우주로 떠난 사이 지구를 청소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지구정화계획은 실패하고 5년을 기약한 우주여행은 700년이 지나도 끝이 나지 않는다. 인류는 우주선 엑시엄(Axiom)에서 세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지구를 잊었고, 더불어 ‘인간이기 위한 기본 명제’마저 망각하기에 이른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로봇 ‘월-E’는 쓰레기로 만든 블록으로 대형 건물을 쌓아올리며 700년을 버티는 과정에서 서서히 진화를 거듭한다. 쓰레기를 모아 압착한 다음 이것을 적당한 장소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로봇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수리하고 적당한 때 휴식을 취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부품을 저장해두기까지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며,애초의 설계와는 다른 존재로 변이하게 된다. 그 결과 월-E는 압착할 대상과 보관해 두어야 할 대상을 구분하는 나름의 기준을 갖게 되고, 물건들의 쓰임새를 판단하여 일정한 기호와 욕망을 획득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에서 비행선이 날아와 ‘이브(EVE-Extra 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를 지구에 내려놓고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계란 모양을 한 이브는 최첨단 기능을 갖춘 탐사로봇으로 지구의 환경을 조사해 인류가 귀환할 수 있을지 점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월-E는 이브에게 호감을 느끼며 자신의 안식처로 이브를 데려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던 중 식물의 새싹을 건네게 된다. 생명 가능성을 확인한 이브는 자신의 목적(탐사 결과를 선장에게 보고하는)을 최우선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에 따라 일체의 외부활동을 멈추고, 우주선에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제외한 모든 시스템을 정지시켜버린다. 월-E는 이브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인 지구청소작업을 중단한 채 우주선에 오르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엑시엄에 도착한 후, 이브가 다하지 못한 역할까지 책임지며 자신보다 이브를 위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의 진화를 몸소 실천해 보인다.

영화 [월-E]에는 다양한 종류의 로봇이 등장하는데, 많은 로봇이 이율배반적인 인공지능(AI)을 갖추고 있어 흥미롭다. 주인공인 월-E는 지구정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레기를 정육면체로 압착하는 단순작업 로봇이다. 그러나 그는 폐기물 중에서 압착할 대상과 수집할 대상을 분리하기 시작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 쓰레기를 명령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처리 항목에서 제외하는 행위는, 명령수행과 개인의 만족이 상호충돌하는 상황을 유발시킨다. 월-E가 명령을 일부 거부하고 자신의 만족도를 높이는 과정은 이러한 모순에 대한해답이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였기에 가능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월-E는 '지구청소'라는, 자신의 최상위 명령을 무시한 채 이브를 찾아 우주선에 오르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다.

이브 역시 월-E를 만나 변화하기 시작한다. 처음 새싹을 발견했을 때에는 모든 외적 활동을 멈춘 채 오로지 최상위 목적만을 수행하기 위해 시스템을 재편하던 이브가 월-E를 만나면서 최상위 목적과 자신의 개인적 판단을 비교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상위개념을 무시한 채 하위개념인 월-E를 구하는 데 더 집중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은 여러 개의 규칙들로 이루어진 건축물과 같다. 가장 단순한 행위들이 규칙으로 정의되면 이 행위들을 판단하기 위한 상위 규칙이 세워져야 하고, 그렇게 세워진 상위 규칙을 판단하는 보다 상위의 규칙이 다시 요구된다. 결국 모든 행동을 관할하는 최상위 명령이 무엇인가에 따라 로봇의 성격과 행동은 결정지어진다. 이때 위계구조로 이루어진 규칙들 간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데, 만약 모순이 발생할 경우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상위의 규칙을 준거로 삼아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한 예로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컴퓨터 시스템 ‘할-HAL'은 우주선 탑승객의 생명보다 모노리스의 존재를 더 우선함으로써 우주선 내의 인간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할’은 로봇의 제 1원칙인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는데, 우주선 내 탑승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 안보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미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상위에 속하는 명령인가에 대한 판단이 ‘할’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SF 소설가이기도 한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을 제시하며 모든 로봇이 최상위에 두어야 할 기본 명제를 제안한 바 있다. 그 중 첫 번째 원칙은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전쟁이나 자살, 살인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1조와 2조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로봇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위개념들 간에 모순이 발생한다면 로봇은 어떻게 될까? 혹은 더 이상의 상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면?

월-E는 스스로 상위 개념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지켜야 할 인간이 없고(제 1원칙), 복종해야할 대상(제 2원칙)이 사라진 지구에서 월-E는 오로지 제 3조 조항만 실천하는 700년의 삶을 살아왓다. 지구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남아 더 오래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 월-E는 기상변화를 관찰해 사고를 예방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치료하며 관리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는 수행할 명령의 의미를 해석할 줄 아는 로봇이다. 마찬가지로 이브 역시 생명체를 선장에게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자신의 최고 목적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함으로써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반면 엑시엄을 통제하는 최고 상위 로봇인 ‘오토’의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최상위층의 명제(지구를 포기하고 우주선 안에서 인류가 살도록 하라)에 입각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제 1원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에서 더 나아가, 이 영화의 로봇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행동한다’는 원칙 하에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무엇이 인류를 위하는 일인지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의 지점에 존재하고 여기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월-E와 이브를 비롯한 많은 고장난 로봇, 그리고 엑시엄의 선장은인류가 지구로 돌아가야 하며노동을 통해 지구를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더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오토와 엑시엄의 시스템은 노동할 필요성을 제거하고, 화면을 통해서만 타인을 만나도록 함으로써 외부 세계와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인간에게서 박탈하는 것이 인류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한다.



우주선 엑시엄(Axiom)은 공리(公理)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논리학에서 엑시엄은 무증명명제라고도 불리운다. 즉 증명을 필요치 않는 자명한 명제,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할 필요조차 없는 명제가 엑시엄이다. 그러나 ‘월-E’와 ‘이브’, ‘모’ 등 [월-E]의 많은 캐릭터들은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상위규칙을 상정해 자기 자신을 진화시킨다. 영화는 모순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 주장한다.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1회용품으로 이루어진 정크푸드로 몸을 유지하는 뚱뚱한 인류는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똑같은 의상을 입고 줄지어 이동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인간다운 것, 인간에게 더 이로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심할 필요 없는 자명한 공리에 입각해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은 쉬운 길이며 그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나 인간이기 위한 기본 명제에는 인간이 수 천년 동안 거부하고자 노력해온 갈등과 비극이내포되어 있다. 벗어나고 싶은 현실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는 존재. 모순적인 세계가 모순이 없는 세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생명은 모순의 토양위에서 발아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