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읽기

미쓰 홍당무 : 사랑 이전에 필요한 여성 내부의 연대감

by 늙은소 2009. 1. 2.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약간의 감정 변화에도 얼굴이 붉어져 그 마음을 온통 들키고 마는 양미숙(공효진)은 29살의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이다. 그녀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성장한데다 어머니마저 여의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예쁘지 않은 얼굴에 안면홍조증까지 있어 왕따가 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성장한다. 선택은 두 가지. 피부미인이 득세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얼굴을 숨기고 살아가든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붉은 얼굴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러나 후자를 선택하자니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전자를 택하려니 교사라는 직업이 문제가 된다. 교단을 무대 삼아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인데다 원래 여학교가 ‘말 많은’ 세상의 축소형이지 않은가.

이래저래 비호감의 대상인 양미숙에게 어느 날 중학교 영어 교사 발령이 떨어진다. 자신보다 어리고 예쁜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황우슬혜)에게 밀려난 것. 심지어 10년 간 짝사랑 해온 자신의 스승(10년 전 담임이었던)이자 동료 교사인 서종철(이종혁)과 이유리가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양미숙의 질투심은 끝없는 확장을 시작한다.


미숙은 서종철의 딸 서종희(서우)와 연대해 자신의 숙적 이유리를 공격하는 한편, 종철의 아내 성은교(방은진)가 운영하는 발리댄스 학원에서 교습을 받으며 부부사이를 관찰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영어학원을 다니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퇴근 후 발리댄스를 배우는 일상에, 다시 서종희와 만나 작전을 모의하고 이유리를 상대해야하는 피로한 일정이 겹치며, 양미숙은 애초의 목적이 서종철의 사랑을 얻기 위함인지, 이유리를 괴롭히기 위함인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무엇보다 중학생에 불과한 서종희와 나이를 넘어선 우정을 쌓게 되면서 그녀는 ‘얻고 싶은 것(서종철과의 사랑)’과 ‘잃고 싶지 않은 것(서종희와의 우정)’ 사이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과 우정사이’를 비로소 체험한 양미숙은 10대 시절 치렀어야 할 성장을 이제야 경험하는 여성의 뒤늦은 성장기를 보여준다. 남녀의 사랑 이전에 배워야 할 ‘친구’의 연대감을 소중히 하는 양미숙의 선택은 사랑스럽고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정당한 이유를 얻는다. 그녀는 평생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남의 것을 탐내고 질투하는데 온 인생을 투자하였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감정이 싹트자 비로소 사랑보다 우선할 것이 우정이며, 화해와 용서임을 배우게 된 것이다.

[미쓰 홍당무]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러 명의 주인공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다룬다. 8살 연하인 남편에게 지나칠 정도의 경어를 사용하는 서종철의 아내 성은교는, 영화 말미에 이르러 반말을 사용하며 결혼할 당시의 강인한 자신으로 돌아오고, 건방지다는 이유로 전교생에게 왕따를 당하는 서종희는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양미숙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여줌으로써 용서와 수용을 배워나간다. 



많은 여성들이 중고교시절을 거치며 왜곡된 정체성을 키워나가고, 뒤늦게 이를 수정하느라 힘겨운 사회생활을 병행해야만 한다. 폐쇄성이 짙은 여학교에서 정체성의 왜곡 현상은 종종 목격된다. 몇몇 사학들 중에는 이사장의 독특한 세계관과 종교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전교의 학생과 교사에게 강권하며 작은 세계를 지배하는 룰로 적용시키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의식에 눈을 뜨며,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중요한 순간을 경험하는 이 터전은 왜곡된 집단의식과 어긋난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계로 돌변하기 일쑤이다. 학교마다 ‘미친개’라 불리는 교사가 존재하듯, 많은 여학교에는 ‘변강쇠’라 불리는 교사 역시 존재한다. 각 반에 ‘옹녀’를 점찍어두고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건네는 교사와, 수업시간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신의 성기를 긁어대는 교사가 해마다 여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여학교 바깥에는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노출증 환자가 있고 통학 버스 안에는 여학생을 더듬기 바쁜 중년의 손이 몇 개인가 꿈틀거렸다. 여자아이들은 집단이 되었을 때에는 그런 남자들을 비웃고 헐뜯으며 연민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그 집단으로부터 이탈하였을 때 자신이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의 신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여자아이들의 연대감은 이런 식으로 학습되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한 아이들의 집단의식은 생존과 직결되며 종종 폭력적으로 돌변하였으며 때로는 모두가 잊기 힘든 정신의 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 양미숙은 바로 그런 외상을 경험한 여성들의 잊고 싶은 기억을 모두 간직한, ‘상처 입은 여학생의 집약판’에 가까운 인물이다. 소외된 기억만 간직한 양미숙은 잊고 싶은 기억을 떨쳐내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괴로운 추억을 상징하는 졸업사진을 거울에 붙여놓는다. 자신이 졸업한 학교로 돌아와 교사가 되는 것은 서종철을 다시 만나는 길이며 동시에 괴로운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녀는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모욕을 관심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여성이기도 하다. 서종철의 무관심을 ‘애정을 감추기 위한 위장’으로 받아들이는 그녀는, 자신에 대한 모욕마저 ‘관심’과 ‘질투’의 일종인 양 해석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려 노력한다. 그녀에게는 괴로운 추억으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있었고 자신을 직시함으로써 성장할 기회 역시 존재하였다. 그러나 양미숙은 모든 학생들이 졸업 후 떠나가 버린 학교에 홀로 돌아옴으로써 퇴행을 택하였고,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러한 퇴행은 비단 ‘학교’라는 테두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교와 다를 바 없는 직장문화 역시 도처에 존재하지 않는가. 편을 나누어 유치한 힘겨루기를 하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회사 대표의 가치관을 전 사원이 따라야 하는 회사는 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양미숙은 왕따로 성장한 여성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끄러워 얼굴 붉히게 되는 기억을 지닌 자라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까닭도 없을 터. “사람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벌일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그만한 이유’에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그 이유를 들어주는 시간을 타인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