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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이 문장은 틀리다

by 늙은소 2004. 6. 19.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것은 한 줄로 늘어선 채 앞만 보고 걸어가는 행렬에서 동떨어져 나와 자신이 속해 있는 행렬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


‘이 문장은 틀리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옳아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자기 자신이 틀렸음을 말하고 있다. ‘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과 반대되어야 하니 문장은 ‘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거짓일 경우, ‘틀리다’는 말과 동일하니 문장은 ‘참’이라 해야한다.


이것은 ‘괴델’의 결정 불가능성 명제 중 하나에 속한다. 특히 이 문장은 재귀순환 하는 ‘자기지시문장’에 해당한다. 자기지시문장은 스스로를 언급하기에, 참 거짓을 확정지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위의 경우처럼 모순된 관계 속에서 무한 반복하는 참과 거짓의 공존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반드시 참이거나, 혹은 반드시 거짓이기만 한 문장이 존재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반드시 참이거나 거짓이기만 한 체계 속에 닫혀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참/거짓’을 구분하려는 의지와는 무관하다 할 것이다.


‘나는 옳다’는 문장은 ‘무엇에 관한’이 빠져있음에도 반드시 ‘참’이기만 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내’가 옳다고 선언한 것에 있다. 왜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가, 틀린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는다면 ‘옳음’이라는 허상의 테두리는 견고해질 것이며, 도약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


자연수는 사칙연산에 대하여 모두 닫혀 있지 않다. 덧셈과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는 자연수는 뺄셈을 통해 완벽하게 닫혀있지 않은 다른 공간을 발견한다. 음수라는 영역은 자연수보다 확장된 새로운 체계를 가능하게 했고 거기에서 정수라는 보다 넓은 테두리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완벽하게 닫혀있지 않은 미완의 열림에 대한 탐구는 스스로에게도 가능하다. 그것을 위해 모순된 ‘자기지시문장’을 던져본다. ‘거짓’이 '참‘이며, ’참‘이 ’거짓‘으로 탈바꿈하는 질문을...


이때 중요한 것은 재귀순환 하는 무한사슬로 하여금 스스로를 포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느냐, 죽느냐’와 같은 문제는 함몰하기 쉬운 함정 중 하나로, 선택이 불가능하며, 불확정적인 순환고리를 생성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한 단계 높은 층위의 사고이며 행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와 수정할 수 없는 기층을 지니고 있음 또한 잊어선 안된다. 나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선언함으로써 자신을 제거할 수 없다. 완벽하게 닫힌 공간이 있거나, 혹은 아무리 열린 공간을 소요하여도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그러한 불가능성으로부터 나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가능한 범위,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아닌 나의 외부를 통해 내부의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다른 듯 닮은, 닮은 듯 다른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

나는 삶의 흔적을 더듬어 나감으로써 내 자신을 읽어내려 한다. 이것은 완료형 시제로서의 ‘읽음’이 아닌, 진행형의 ‘읽는’일 것이다. 그러나 ‘읽음’을 위해서는 ‘쓰여진’이라는 과거에 완료된 하나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과거라는 선행적 사건들의 집합, 축적된 지층 위에 뿌리내린 ‘나’는 지나가 버린 시간의 양분을 섭취하며 분열된 자아를 유포한다. 완결된 과거를 현재 읽음으로써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꾀하려는 시도는 종종 과거의 상처를 현재의 것으로 치환함으로써 그 안에 안주하려는 유혹으로 좌절하기도 한다.


거울 속의 상은 나로부터 완전히 박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인식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허상이다. 나의 문맥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비롯되지 않으며, 문맥의 허상 속에 쉽게 사로잡히는 특성에 기대어 파악되어야 한다.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확장하기 위해 소환된 과거는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강력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냄으로써 현재로부터 도피하곤 했던가. 비극적 주인공의 운명적 삶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값 싼 노력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거와의 단절은 필요하다. 단절은 제거나 망각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현재의 은폐를 위해 왜곡되는 나의 역사를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과거와의 화해는 지나온 시간의 축적을 긍정하면서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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