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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by 늙은소 2004. 6. 19.
진실된 사랑을 만나야만 저주가 풀리는 동화는 왜 그리 많은 것일까?
무수히 많은 괴물들이 아리따운 아가씨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눈물 한 방울에 생명을 건지고 저주에서 풀려나 왕자로 변신한다. 물론 동화는 '사랑'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사랑은 반드시 '진실된', '진정한' 사랑이어야 한다. 동화 뿐 아니라, 만화, 영화에서도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흔하게 써먹는 줄거리 중 하나이다. 그 놈의 기적은 왜 그리 흔하게 이루어지는지..

과거의 물건과 과거의 옷차림을 하고서 방안에 틀어박혀 먹지도 않고 오로지 과거로 갈 것만을 기원하면 결국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거나, 강인한 의지 하나만으로 불가능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이야기 한 두개쯤은 바로 댈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원하는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믿음에 진정성이 부족한 까닭인가? 내가 흘린 눈물이 죽어가는 풀 한 포기도 살릴 수 없는 것은 내 영혼이 더러운 까닭인가? 혹은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인가? 밤 낮 먹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고 오로지 그것만을 기원하고 생각한다면 이루어질 것인가? 당신은 그렇게 간절히 기원해본 일이 있는가?
...

영혼을 줄테니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원해봐도 악마는 거래하자며 나타나지 않는다.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테니 시간을 거꾸로 돌이켜 달라고.. 잘못되어버린 내 인생의 전환점, 삶의 한 지점으로 나를 돌려보내 달라고 기원해보아도 일상의 흐름은 거스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절망은 나에게 일어난 불운에 있지 않다. 그 절망적 사건을 돌이켜 달라는 진실된 기원이 침묵으로 외면당할 때 비로소 절망은 찾아온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두 다리를 잃거나, 병으로 시력을 잃거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를 돌려보내 달라는 외침은 괴물이 왕자가 되는 변용을 가능케 한 여인의 눈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진정성을 담고 있을 것이다. 때로 그저 외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증명할 수 없으리라는 걱정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택한다. 기차에 뛰어들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드러낸다. 현실의 그는 죽었으나, 모를 일이다.
그는 정말 과거로 돌아간게 아닐까?
...

로또는 진정으로 무언가를 바래본 일 없는 이들로 하여금 간절한 기원을 하게 만든다. 절망적인 불운이나 쓰라린 실패를 겪지 않은 일반인까지 그런 믿음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그러나 몇 십억, 몇 백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단위는 이제껏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많은 것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킨다. 예정된 운명보다 10년 앞당겨 죽어도 좋으니 복권 1등이 된다면 어떨까? 평생 결혼도 안하고 홀로 외롭게 지내는 대신 복권 1등이 된다면 어떨까? 태어나지도 않은 내 첫째 아이의 목숨과 복권 1등을 바꾼다면 어떨까?

동화에서는 악마의 이름을 맞춤으로써 첫째 아이의 목숨도 구해내지만 현실에서는 아이의 목숨과 거래하자며 나타나는 악마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매 주 몇 십만, 몇 백만명의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 묵살되고, 침묵으로 산화된다. 복권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무심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당첨되지 못한 복권과 함께, 현실이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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