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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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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늙은소 2004. 6. 19.

5년 쯤 전의 일이다. 수업시간에 책 하나를 선정해 학생들이 분담하여 번역하는 수업이 있었다. 자신이 맡은 분량이 많네 적네 말들이 많아 그 꼴 보기 싫어 다들 꺼리는 챕터를 떠안고 보니 5인분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쌈장스러운 일이다. - -;;

번역과 함께 발표까지 해야하는 상황이라 자료조사를 시작했는데, 몇 백장 복사물 중 책 두 권의 일부(약 3~4페이지) 약 90%가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책 모두 갈브레이스의 '풍요의 사회'를 인용하고 있었는데, 인용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고 그에 대한 해석과 비유까지 모두 같았다. 배신감도 들고 호기심이 생겨 어느 책이 더 먼저인가 따져보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두 사람 모두 '풍요의 사회'를 반드시 봤어야만 하는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쇼펜하우어의 글을언급했다면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지 않은 내가 어떻게 인용해야 옳은 것인가? 프랑스나 독일 등의 현대철학을 원문으로는 커녕 한국어로도 읽지 못한 많은 이들은 이것을 연구한 인문학자의 해석과 시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다고 '학이시습지...'를 언급하기 위해 논어를 읽어야하는가?

물론 모든 것을 그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딘가 경계가 있겠거니.. 그들은 알겠거니.. 생각하며 나는 길을 잃는다.

...

당시 번역을 마친 뒤, 다른 학생들 분을 포함한 전체 번역의 교정을 맡았는데 100년간의 미국 대중문화를 다룬 책인 탓에 8,90년대는 몰라도 이전의 경우는 수정할 것이 제법이었다. 한 200여 개 쯤 각주를 달다보니 점점 귀찮아지며 나중에는 그저 내가 알던 것을 적게 된다.

원문에서는 존웨인을 Duke, 엘비스 프레슬리를 king이라 칭하는데 그에 대한 해설이 필요할 듯 싶었다.철저하게 미국의 대중문화 100년 역사를 다룬 탓에 그들에게는 중요하지만 우리는 잘 모르는 흑백영화나 음악 등이 종종 제시되기도 한다. 남들보다 관심이 높았던 탓에 부연설명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 것들에 각주를 달다보니,이것을 내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출처를제시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냥 내가 봤는데 그랬다더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당연히 안다 생각한 것들의 근거자료를 새삼스레 찾아야 하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인문,사회학의 은혜로운(?) 축복을 받은 일 없는데다, 학생들끼리 나눠가지기로 하고서 번역한 것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접근한것도 문제다 싶으나, 시작된 질문은 쉽게 멈추어 지지 않는다.

먹을 것 안먹어가며 충동적으로 사들인 저 책들의 저자들은 나름의 경계를 세우고 자신의 글 속에 타인의 생각들을 용해시킨 것일까? 나는 알 리 없지만 그들은 아는 '룰'이 있는 것인가? 일년에 한 번 전 세계 인문,사회학자들이 밀림 오지(혹은 분지)에 모여 그 경계를 세우는 학회를 열고 있는 건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잡다한 생각과 함께 실어증이 시작된다. 내가 무얼 알아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점점 더 다른 이들은 관심가지지 않은 이상한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의심스럽다.

'이건 정말 내 생각이 맞는 것인가?'

...

* 반대의 경우도 세상에는 물론 존재한다. 자신의 생각에 무게를 두기 위하여 '근거'를 남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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