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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옴부즈맨 프로그램에 대한 짧은 생각

by 늙은소 2004. 7. 16.

신문이나 잡지를 사면 독자의견을 우선 챙겨보는 편이다. 글을 보낸 독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아니다. 그 글이 택해지기까지의 선택기준이 궁금한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좋은 의견의 기준’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보통은 주어진 상황이나 문제를 놓고, 다수의 의견을 대표할 만한 글 하나를 내보내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혹은 지난 호의 기사 내용과 관련한 독자의 글 중 우수한 것을 가려 내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독자의 글은 편집자의 손길로부터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여졌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생소한 그의 이름과 뒤따르는 주소가 한 명의 독자를 더욱 추상적인 인물로 만들어준다. 그는 독자 일반을 대표한다. 그가 아무리 바보 같은 의견을 말해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가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잡지사와 신문사를 찬양하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가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대표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의견을 모아서 전달하는 입장도 못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조차도 온전히 말하지 못한다. 그저 매체의 필요에 따라 채택된 것뿐이다. 그것도 단 한 번. 중요한 것은 매체가 왜 그의 글을 선택했는가에 있다. ‘빨갱이가 대통령 후보가 되다니..’ 따위의 글을 독자 의견에 당당하게 내보내는 모 일간지의 판단 기준이 중요한 것이지 그 글을 쓴 독자 한 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종종 발견하게 되는 독자의견 중 흔한 경우가 스스로를 독자의 입을 빌려 칭찬하는 경우이다. 좋게 봐주면 앙증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신들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라는 말을 어떻게 당당하게 내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독자의견이니 존중해줘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수도 있고, 정말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신문이나 주간지, 잡지 등은 독자의견을 챙겨보는 재미가 있었으나, TV에서 방영하는 방송비평은 봐주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

방송위원회에서 협의라도 한 듯, 몇 년 전 어느 날 각 방송사는 동일하게 자사 방송을 비평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옴부즈맨'이라 불리는 프로그램들은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니 생색은 내자는 식의 태도도 그렇거니와, 자기비판 프로그램을 스스로 운영한다는 것이 언론의 양심적인 행동인양 포장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 곳에 진정한 비평은 존재하지 않았다. ‘함께 하는 사회’ 류의 기업 슬로건처럼 공허함이 있을 뿐이다.


요즘은 KBS의 ‘미디어 포커스’를 즐겨 보는 편이다. '쇼 프로그램의 선정성'과 '드라마의 비현실성'이라는 두 개의 주제 외에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던 방송비평 프로그램과 확연히 다른 태도와 내용이 변화된 오늘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방송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 의견은 비난 일색이다. 특정 언론 죽이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비난의 주된 요지인데, 지나친 엄살에 속은 독자들의 앞선 염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보통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비판하기는 어려워도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는 게 일반적이다. 남 욕하긴 쉬워도 내 욕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왜 언론사와 방송사는 자기비판은 해도 다른 매체 비판은 금기시해 왔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불문율이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학기 언론정보학과 수업을 들으며 몇 편의 소논문과 저널을 읽었는데, 인터넷과 더불어 찾아온 시대변화 속에서 언론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하여 제시된 공통된 의견 중 하나가,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상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중립성의 소멸이었다. 이미 특정한 논조를 표방한 인터넷 신문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고, 기존 매체들은 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보다 심도있고 깊이있는 정보와 토론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중립성을 보장하기란 어렵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탄행 정국'과 관련한 언론의 보도 태도를 '편파적'이었다고 밝힌 언론학회 보고서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편파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미 언론이 대부분의 사안에 대하여 편파적이고 편향적인 자기들만의 기준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우선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중립'의 개념이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

비판의 수용과 이를 드러내는 태도에는 ’비판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이 남겨진다. 결국 어떠한 경계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비판은 ‘비판도 수용하는 인간’이라는 의식적인 경계로부터 얼마나 더 멀리 떨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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