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2004.07.27 13:15

올드보이

감독 박찬욱

출연 최민식,유지태,강혜정

개봉 2003.11.21 한국, 120분

박찬욱 감독이 영화의 핵심을 '복수'로 설정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원작인 만화와 궤를 달리한다. 자신이 왜 가두어져야 하는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기한을 알 수 없는 감금생활에 처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을 가둔 자에게 한 발씩 다가가는 주인공과 그러한 주인공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설계한 미로 속에서 차갑게 웃음짓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의 대치관계는 분명 만화와 동일하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복수를 하게 만든 원한이 다른게 아니라, 두 인물이 모두 만화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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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만화에서 '우진'의 역할인 '카키누마'는 이미 초등학생시절부터 자신의 '천재성'과 그 천재성으로 인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독감을 인식한 어린아이로 그려진다. 그는 주변의 정보를 빠르게 흡수함으로써 상대방을 분석해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며 이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에게 타인은 낯 선 것이 아니라 손쉬운 대상일 뿐이었다. 자신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음을 단정함으로써 그는 외부와 자신을 차단하였고, 그 '인식'은 완벽한 고독을 인정하는 행위임도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은 손쉽다. 모든 것을 알아버린 카키누마는 웃거나 울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추한 외모를 성형수술로 개조한 어른이 된 카키누마의 웃음은 그렇기에 가면에 가깝다. 그런 카키누마가 단 한 번 동요한 것은 바로 '고토(대수의 역할에 해당)'에 의해서였다. 같은 반 급우였던 고토는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나 강직함과 선량함이 배어나오는 아이이다.

어느날 카키누마의 어둡고 고립된 존재감을 인식하지 못한 음악교사가 그를 무대에 세움으로써 사건은 시작된다. 카키누마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담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위는 어둠 속에서 고독할 것을 받아들인 카키누마에게는 대단히 반갑지 않을 뿐아니라 난처하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그는 반 아이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러야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대충 노래를 부르고 내려와 버렸으면 됐을 상황에서 카키누마는 자신도 모르게 '진정성'을 담아 노래를 부르고 만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이해할 리는 없었다. 그는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고토가 자신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린 다. 고토는 왜 자신이 눈물을 흘린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노래 속에 담긴 카키누마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순간 카키누마의 고독에 공명하였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카키누마는 동요했다. 그리고 고토가 그날 있었던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에 상처받는다.

만화속의 카키누마는 영화의 우진처럼 울거나 소리치거나 흥분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진은 '원한'과 '복수'라는 키워드가 지배하는 인간이나 카키누마는 인간을 초월해, 마치 한계에 도달한 존재와도 같기 때문이다.

카키누마의 존재는 얼마 전 읽은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영원성을 부여받은 일군의 사람들에 관하여 적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문화를 일으켜세웠고 거대한 건축물로 구성된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그 위엄과 영원불변함을 역사 속에 조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의 의미가 퇴색되며 어떠한 욕망이나 욕구도 언젠가는 실현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이제 무엇도 욕망하거나 욕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이 세운 도시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였고, 그들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이 스스로의 사색만으로도 언젠가는 얻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언어를 망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죽지 않기 때문에 육체를 비롯한 정신 외의 모든 것을 망각하고, 짐승처럼 퇴화되어버린다.

카키누마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 흡사 전지전능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가 고토를 가두고 그의 모든 행동을 예측한 듯 설계한 미로는 그에겐 손쉬운 게임일 뿐이다. 단지 모든 것을 손에 쥔 뒤에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과 무력감을 끝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게임이 이 미로이며, 그 미로 속의 주인공이 고토였다는 것일 뿐...
영화 '올드보이'는 그러므로 만화와 분리하여 낯선 시각으로 접근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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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원한이 무엇이었는가' 밝혀지는 것만으로 해결되는게 아니다.
'15년 간의 감금'과 '아내의 죽음', '살인자라는 누명'... 잔인하고도 치밀한 복수 이면에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오대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의 '왜 나를 가두었는가'라는 질문은 그저 답을 들음으로써 해소할 수 없는 초조함과 두려움을 낳는다. 해답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원한'이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감독은 '관객이 납득할 수 있는 원한'을 제시해주어야만 한다는 중압감을 짊어진다.

오대수는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네가 나를 바보라고 놀렸다'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해답이 놓여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은 어느 돈많은 사이코가 무작위로 추출한 상대를 장난감삼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라면.. '왜 가두었는가'의 해답이 없거나 있어도 납득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을 때 찾아올 허무함 보다는 차라리 엄청난 진실일지라도 있는게 그에게는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가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터이니..

놀랍게도 영화에서 오대수의 죄는 '네가 나를 바보라 놀렸다'와 '무작위로 추출된 대상'의 유형에 더 가깝다. 그는 우연히 '우진'과 '수아'의 관계를 목격한 것이고, 그것을 이사가기 전날 친한 친구 한 명에게 말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겠으나 누구나 한 번 쯤 저지르기 쉬운 가벼운 죄이기에.. 오대수나 관객 모두 '납득'하기엔 석연치가 않다. 문제라면 소문이 일파만파 확장되었으며, 추악한 말들로 인해 그녀가 더럽혀졌고, 끝내 자살로 몰고갔다는 결과에 있다.

이것을 눈치챈 감독은 여기에 '미도'라는 인물을 집어넣는다. (물론 원작 만화에도 최면술에 의해 만나도록 조종된 예리가 등장한다) 오대수와 관객이 '원한이 납득할만한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등장한 미도는 원작 만화와 달리 '오대수의 딸'로 설정된다. 상상할 수 없었던 가공할만한 이 폭탄은 복수의 답을 찾아야 하는 주인공이 '복수'와 '원한'을 망각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 지점에서 '복수'의 화살은 바로 오대수가 아닌 '우진'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대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우진이 참을 수 없도록 증오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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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마지막으로 누나의 죽음을 회상한다. 댐에서 떨어지기 전 자신의 손을 잡은 동생을 향해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 동안 무서웠지?'
이문장은 오대수에 의해 자신들의 관계가 목격된 이후 소문이 퍼져나가고 공포감에 시달린 나머지 상상 임신한 누나가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몇 달 간의 기간을 유추하게한다. 바로 이 몇 달 간 '우진'의 누나 '수아'는 독방에 영혼과 정신을 유폐시키고 있던 것이다.

소문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었던 '수아'에게 '우진'은 현명한 연인이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는 사건이 터진 이후 소문이 확산되는 와중에서 그녀를 위로하거나 해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현실적 문제'를 대화에서 배제함으로써 그녀를 현실 속에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녀는 두개의 자아로 분리되며,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자아를 유폐시킨채 우진에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며, 죽음의 선택 역시 혼자만의 것이었다.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에는 우진이 너무나 나약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에..

누나의 '그 동안 무서웠지?'라는 말은 그간 너도 무서웠기에 그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안다는 그녀의 마음이 들어있다. 차라리 오대수가 수아의 상대 남자가 자신임까지도 말하였더라면 나았을 것이라고 '우진'은 생각했을 것이다. 남매간인 것을 알고도 사랑했으나, 막상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제 입으로 나설 수 없는 비겁한 자신을 발견한다. 오대수를 향한 그의 원한은 비겁했던 자신을 향한 원한이다.

우진은 스스로를 향한 '원한'의 크기를 알고 싶어한다. 거기에 맞는 복수를 스스로에게 가하기 위해서.. 누나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자신, 퍼져나가는 소문 속에서 나서지 못하고 침묵한 자신, 그녀의 손을 결국 놓아버린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복수가 합당할 것인가. 오대수는 스스로 혀를 잘라버리면서까지 '미도'를 지키려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진의 '냉소'는 자신의 비겁함이 스스로를 죽여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합당한 원한이며 비겁함임을 확인한 자의 '냉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겨눈 총에 오대수라는 탄환을 장전함으로써 자살을 택한다.

그렇다. 올드보이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복수'가 완성되어도 '통쾌함'은 주어지지 않는다. 본래 '복수'란 그런 것이다....

Posted by 늙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