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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Knowing : 진화의 또 다른 이름

by 늙은소 2010. 3. 5.











노잉(Knowing), 2009

감독 : 알렉스 프로야스
출연 : 니콜라스 케이지, 로즈 번, 챈들러 캔터베리, 라라 로빈슨

* 사용한 이미지는 리뷰를 위한 것으로,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근접 촬영으로 바라보면, 모든 변화는 죽음과 새로운 시작의 연속체로 파악된다. 진화는 멸종의 또 다른 정의다.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를 꾀할 때 번데기로서의 삶은 사라진다. 공룡은 멸종하였으나, 파충류라는 상위 개념에서 그들은 변화의 한 부분으로 수용된다. 멸종되어 사라지는 개체 위에 변화의 걸음을 내딛으며 새로운 생으로 진화하는 것. 멸종인가, 진화인가. 파멸인가, 시작인가.

[노잉]은 시작과 파괴의 매듭을 손에 쥔 채,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나 당신이 어떠한 답을 제시하든 그 손은 결코 펼쳐지지 않는다.



1959년 미국 메사추세츠, 개교기념일을 맞이한 어느 초등학교에서 타임캡슐 행사가 진행된다. 아이디어를 낸 루신다 엠브리(Embry -> Embryo, 배아를 의미)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50년 후의 미래를 이해할 수 없는 숫자로 채운다. 2009년, 50년 전에 묻어놓은 타임캡슐을 꺼내는 행사에 참석한 존의 아들 케일럽(Caleb, 갈렙 -> 모세의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믿음을 보여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은 인물)은 루신다의 종이를 받게 되고 그날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케일럽의 아버지인 존 코스틀러(니콜라스 케이지)는 MIT 천체 물리학과 교수로 어느 날 술에 취해 아들이 가져 온 종이를 살펴보다 숫자의 규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최근 50년 간 전 세계가 겪은 재난의 기록으로, 사건이 발생한 날짜와 사망한 사람의 수, 그리고 사건 발생 장소의 위치정보로 채워져 있었다. "모든 사건은 우연에 의한 것일 뿐,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강의해 온 존은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과거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함.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재앙에 대한 공포. 존은 루신다의 종이에 기록된 숫자들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도, 예정된 재난에 개입하여 결과를 바꾸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개입에도 불구하고 숫자의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절망한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루신다를 만나려던 존은 그녀가 이미 몇 해 전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루신다의 딸 다이아나를 찾아간다. (다이아나의 본명은 Diana Wayland로 Way Land라는 성은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을 암시한다) 다이아나의 도움으로 루신다가 죽기 전 살았던 집을 조사하게 된 존은 루신다가 남긴 종이의 마지막 숫자의 의미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죽음에 이르리라는, 즉 지구 종말에 대한 경고가 루신다가 남긴 종이의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모든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루신다의 예언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존과 다이아나는 각자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뛰어다닌다.



예정된 종말의 날. 존은 루신다의 예언이 그녀의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며 미래를 예측한 제 3의 존재가 소리를 통해 루신다에게 사건을 미리 경고해왔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아들 케일럽과 다이아나의 딸 에비를 데리고 지구를 떠나려 한다는 것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존은 케일럽과 에비를 우주선에 태워보낸 후 홀로 남아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오랫동안 대화하지 않고 지낸 아버지(목사->종교)와 아들(천체 물리학자->과학)은 세계의 종말을 함께 맞이한다.

지구가 파괴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새로운 땅에 착륙한 아이들을 보여준다. 낯선 행성의 대지를 달리는 이 아이들은 부모와 헤어져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을 짓지 않는다. 자신들 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듯한, 불안이 제거된 평온함은 그들이 우주선에 오를 때에도 감지되고 있었다. 지구 종말로부터 구원이 예정던 아이들은 목록에 오르는 순간 이미 자신의 부모와 다른 낯선 존재로 진화를 시작한다. 

진화가 멸종의 또 다른 이름임을 상기한다면, 이것을 인류의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행성으로 떠난 아이들을 '지구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부모와, 고향을 잊어버린 듯한 아이들의 표정이야말로 '인류의 멸종'을 확인시키는 결과물이 아닌가. 서글프다. 나의 역할은 버림받은 자이기 쉽지, 버리고 떠나는 쪽은 아닐테니.



부모를 남겨둔 채 아이들만 떠나는 이야기는 '피리부는 사나이'와 아서 C. 클락의 '유년기의 끝'에서 반복되는 모티브다. '유년기의 끝'은 지구를 찾아온 외계문명(오버로드)이 앞선 기술과 문화로 지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며 진화를 맞이하도록 도운 후, 새로이 등장한 아이들(개체의 정신능력이 도약해버린)을 데리고 지구를 떠나는 이야기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한 마을에 찾아온 피리부는 사나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어른들을 벌하기 위해 그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사라져버린 이야기로, 남겨진 부모의 절망과 아이의 소리가 사라진 마을 풍경이 슬픔을 자아내곤 하였다. 이러한 슬픔은 또 다른 디스토피아적 미래영화인 [칠드런 오브 맨]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노잉]은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질 뿐 어느 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은가 질문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결정론이든 비결정론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맞이한 재앙의 크기와 그 영향력이 너무 막대한 탓이다. 우리의 역사와 삶이 사라진 마당에 과거와 현재가 무엇에 의해 움직였는지 그것을 알아 무얼할까 허무해지기만 한다. 그리하여 결국 떠난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우리의 아이가 맞긴 한 것인가 하는 최후의 물음만이 불안과 함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