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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게드전기 : 총체적 졸작

by 늙은소 2010. 3. 21.

* 사용한 이미지는 리뷰를 위한 것으로, 권리는 제작사에 있습니다.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2006)


감독 : 미야자키 고로
원작 : 어슐러 K. 르 귄


시간이 지나면 대상에 대한 감상 역시 이전과 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좋았던 것이 싫어지거나 심지어 좋아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알지 못하였던 매력을 뒤늦게 발견한 후 미안해지는 것도 예사. 그런 변화의 속성을 이해하기에 섣부른 냉혹함을 경계해 왔는데, [게드전기]는 이에 대한 혹평을 10년이 지나도 번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졸작이었다.


몇 년간 애니메이션을 봐도 이렇다 할 감흥이 없어 감성의 한 축이 무너져내린 것인가 씁쓸함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시작으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며, 새로운 감상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읽으려 하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할 것.'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상징 없이 논하기 어려운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들은, '보는 것' 속에 '읽을 것'을 병렬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해석하려 듦에 따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처럼 메시지의 정체가 뚜렷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벼랑 위의 포뇨]나 [루팡 3세], [이웃집 토토로], [마녀배달부 키키]와 같은 경우, 작품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만한 작품도 지브리의 역사에는 위지한다.

지브리에서 배출해낸 작품의 힘은 사실 메시지가 아닌, 캐릭터에 있었다. 반전과 평화, 혹은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를 담아 온 그들이지만 기실 그 전제는 속 편한 자의 쉬운 논리에 불과하며 견고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부족함을 채워준 것은 삶에 대한, 강인함을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와, 미숙한 주인공을 보듬어 안는 나이든 캐릭터의 온기였다.


종종 그런 가정을 해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시절을 비행기 군수공장에서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백부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근무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야오는 어린 시절 비행의 매력에 사로잡혔고, 이것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왔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하야오의 분신들은 작은 비행기와 함께 하늘로 비상한다. 바람을 느끼며 수평의 풍경과 수직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해방감.

하야오의 '반전反戰'은 자유롭게 날기를 희망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할 목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환경의 파괴를 경고하는 것 역시 비행하며 내려다 볼 풍경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극히 개인적 욕망의 확장은 아니겠나. 그런 생각으로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재미있는 장난감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아이의 욕심에서 확장된 소박한 메시지와, 광활한 풍경과 속도, 높이의 경이로움에 압도된 어린아이를 생각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위의 포뇨]를 감상할 땐 그런 아이 다운 착상이 필요하다. 돼지로 변한 부모를 이사가 반갑지 않은 치히로의 내적 불만으로 읽는다거나, 포뇨로 인해 발생한 홍수로 재산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마냥 신나기만 한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따져 뭘 하나. 다만 폭우로 집안에 수심에 가득할 때에도 물에 잠긴 부엌 풍경이 신비하게 느껴저 은근히 설래고 만 철 없는 아이가 거기 있을 뿐. 화창한 날씨에 푸른 하늘을 날고 싶은데, 소음과 폭약냄새를 풍기며 지나는 거대 비행선이 꼴보기 싫어 전쟁을 반대하는 어른도 있을 수 있는 법.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들을 차례로 찾아보며 든 느낌은, 강건한 가치관을 지닌 큰 어른이라고 생각한 하야오가, 실은 한 번 빠진 것에서 헤어나올 마음이 없는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어른이 아닌들 어떠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은가.


그러나 [게드전기]는 경이로움을 느껴보지 못한 자가 만든,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애초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결과물이었다. 건축가였다는 미야자키 고로(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는 건축물과 도시의 골목이 부각되는 장면에서조차도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 표정이 변하지 않고 입만 움직이는 캐릭터. 감정이 배제된 성우 연기. 흐름과 맞지 않는 음악. 중반 이후 급격히 수준이 하락한 작화. 아무도 설득하지 못할 이야기. 납득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과 결정들까지. 이 정도로 못만들기도 쉽지 않은, 끝까지 보는 것이 자신과의 싸움이 될 판이다. '아버지의 후광 덕에 감독이 됐다'고 일본 내 혹평도 상당하였다는데, 아버지 덕을 볼 것이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해, 하야오의 그늘 아래에서 작업을 하지 그랬나 싶다.(듣기로는 하야오가 아들의 감독직을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연출팀이나 미술 팀이 아예 중간에 단체로 그만둔 것인지, 중반 이후 배경은 물론 인물작화까지 동반 하락한다. (모든 등장인물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변해버린다) 내용과 그림이 TV판 애니메이션보다 더 퀄리티가 떨어져, 싸구려 성인 애니메이션 수준이랄까. '지브리'의 이름으로도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과 충격의 시간을 보냈으니, 어떤 면에서는 이것도 기억할 만한 순간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