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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장르를 소비하는 방법

by 늙은소 2017. 9. 9.

01.
세상에는 자기만의 신파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약점.
조금만 건드리면 툭 하고 와락 울어버리는 지점을어딘가에 각인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리 잘 만든 영화여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는 시큰둥한데 작정하고 울리려 만든 삼류 가족극에 펑펑 울게 되는 그런 단추가 내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어떤 사람은 동물농장 속 버려진 강아지가 스위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엇갈린 채 헤어진 첫사랑이 스위치가 되기도 한다.

신파의 단추가 제각각인 것처럼, 신파를 만났을 때의 대처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부정하거나 항복하거나.

보이고 싶지 않은 약점을 들켰다며 발끈해 성을 내기 보다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낼 줄 아는 사람이 편하다. 어쩐지 나와 닮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에 솔직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약점이 많은 탓에 신파에 약한 나는 눈물이 헤프고도 헤프다.
동화에서는 주인공의 눈물 한 방울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강력한 마법도 풀린다던데. 내 눈물은 싸구려라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 한 마리도 살리지 못한다. 어찌 나는 그리 잘 우는 것일까?
TV 드라마를 보다 눈물을 쏟을 때면 코를 훌쩍이면서 나를 한심하게 여기곤 한다.

'이 얼마나 싸구려 눈물이란 말인가.'


02.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아 목 놓아 울 수 있는 드라마를 하나 찾아보았다.
그렇게 보게 된  [비밀]이다.

여주인공인 황정음씨는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도 참 많이 울게 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6회까지 몰아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6회에 이르러서는 오열을 하며 보다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왕 잠 못자게 된 것, 이 드라마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는지 궁금해 인터넷 커뮤니티 몇 곳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당황스러웠고. 어쩐지 씁쓸하기도 한 차이를 절감했다.

이 드라마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라지 뭔가. 아니 저 두 사람이 그게 가능해?

 

몇 년 전 어느 칼럼니스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살인자인 아버지를 둔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 사실을 힘겹게 고백하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왔단다. 고백을 들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한 말이 자신에게는 충격이었는데, '이런 걸 나에게 얘기해주다니. 넌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였다는 것.

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힘겹게 드러내는 순간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자신의 상식으로는 작가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기에 사람의 상처를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 쓸 생각을 하는 것인지... 성토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상상도 못한 장면이라 화가 나기보다는 현실에서도 저런 사람들을 종종 겪기에 그 칼럼니스트는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낸 게 아닐까?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힘들었겠다며 상대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 둘러보면 꽤 있지 않은가.
'
네가 너의 아픔을 나에게 이야기해주다니.. 이제 정말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된 것 같아

'어머 난 그런 일 한 번도 없었는데, 만약 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난 진짜 못살았을 거 같아.'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그러지 않으셨는데, 그러고 보면 난 참 운이 좋았어.' 블라블라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만나왔던지.

고민 끝에 말을 꺼낸 내가 초라해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03.
[
비밀]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타인의 상처를 장치로 취급하는 태도

게시판에 올라온 많은 글 속에서 여주인공이 겪고 있는 비극은 그저 '장치'였다. 남자주인공과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도구.
재벌 2세 남주인공 '조민혁(지성)'이 '유정(황정음)'을 사랑하게 된 다음,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죄책감을 가지게 할 도구. 모든 비극이 진실이 밝혀질 때의 짜릿함을 위한 장치들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을 여러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가서 겪은 일련의 사고와 아이의 죽음, 출소 후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까지 당하는 그 모든 일들이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저 재벌 2세와의 새로운 사랑을 위한 장치로 보일 뿐이라니. 몇 시간 동안 드라마를 보며 울었던 시간이 허무해졌다.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그래 저건 드라마다모든 것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넣은 장치에 불과하며 거기에 휩쓸려 진심으로 유정을 안타까워 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저리 허무하게 사망한 것에 대해 펑펑 울고 있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몇 번이나 생각을 바꿔보려 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비극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장치일 수 있다.
드라마를 소비하는 방법이 각기 다름을.. 몰입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건 내 '신파' 스위치가 아니었던가.

 

04.
영화에도 '장치'가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이 영웅이라는 걸 강조하게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장면들이 눈에 거슬리는 경우도 그렇고, 화끈한 액션씬을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스토리의 개연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구축한 캐릭터를 망가트리는 작품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작품을 소비하는 게 힘이 든다. 아니 어떻게 소비해야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들이 특히 그렇다.
'
지구 종말, 지구 대재앙' 류 영화를 여러 편 만든 에머리히의 작품을 보며 비극을 체감한 적은 없다. 주인공이 죽을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일조차 없었다. 영화의 모든 것이 장치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이건 영화랍니다~ 도시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는 것을 구경하시라고 만든 영화에요~' 이런 메시지가 쉼 없이 읽히다보니, 재앙은 그저 스펙타클로 전시될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장르의 규칙'에 갇힐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장치와 전략이 이야기와 인물보다 먼저 읽히는 것. 
이런 문제로 인해 '장르물을 표방한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장르의 문법이라는 포장 속에 감춰 둔, 지배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유추하는 것으로 감상의 방향을 전환하곤 한다.



05.
드라마를 보며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장르를 소비할 줄 아는 이들'이다.

가끔 장르를 장르로 소비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때가 있다.
감정의 거리두기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돌아서서 멀리 도망쳐버리거나 혹은 너무 가깝거나.

늘 그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