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형적 사유2018.06.08 02:24

광고를 비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아니 분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동종 업계 종사자들을 위해 조언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혹은 직접 돈을 낸 광고주가 아니라면 광고를 비판해서 뭘 하겠는가.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물건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일 뿐이다.

광고는 철저하게 돈과 연결되어 있다. 돈을 벌기 위해 광고는 만들어지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광고비는 집행된다. 돈 앞에서 광고 감독의 예술혼이나 광고 회사의 자존심 같은 건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창 온에어 중인 광고들을 읽어내는 건 흥미롭다. 처절할 정도로 돈과 연결되어 있는 이 순수한 세계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세상을 명확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돈밖에 모르는 저 사람들이 소비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할 리 없다는 믿음. 그런 믿음으로 광고를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소비자로서의 내가 보인다. 가끔은 말이나 글 보다 돈이 더 믿음이 갈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광고를 보면 역으로 눈길이 간다.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 만든 적당히 촌스러운 광고나, 어떻게든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잡기 위해 애쓰는 집요한 광고들은 그 속내가 적나라해서 오래 들여다보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에서 신기할 정도로 신경에 거슬리는 광고를 내놓을 때가 있다. 저렇게 유명한 회사가 설마 소비자의 심리를 읽지 못햇을 리가? 제작된 광고를 온에어하기 전에 시사도 하고 검토도 했을텐데? 광고를 보고 껄끄러워진 내 감정보다 돈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를 더 믿다보니 광고가 아닌 나에게서 문제를 찾게 된다. 왜 나는 저 광고를 보고 기분이 나쁜 거지? 그런 생각을 한 참 동안이나 하게 만드는 광고. 얼마 전 본 어느 가전제품 광고 역시 그랬다.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집에 들어서면서 광고는 시작한다. 밖에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냐며 나이든 부부가 이들을 맞이하면 젊은 여성은 엄마 집은 공기가 좋다며 기뻐한다. 이후 집안 곳곳에 놓인 첨단 가전제품들이 소개된다. 빨래를 요즘 누가 널어서 말리냐며 어머니가 딸에게 한 소리 하고 흰 머리의 아버지가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낸다. 인덕션으로 스테이크를 굽는 친정 아버지와 옷에서 냄새가 날 지 모른다며 스타일러에 옷을 걸어놓는 딸. 그런 딸을 칭찬하는 엄마. 넓은 마당을 갖춘 세련된 이층집이 보이고 '이제 맘 편히 살아요' 라는 광고 카피까지 이어지면 광고는 끝이 난다.

이 광고 전반에 흐르는 것은 위화감이다. 평범한 서민 가정처럼 연출했지만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다. 


빨래를 요즘 누가 널어서 말리냐는 대사도 그렇고, 바깥은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냐는 어머니의 말도, 이제 맘 편히 살라는 카피에서도 어떤 테두리가 느껴진다. 미세먼지가 들어오지 않는 공간을 우리는 제공할 수 있으니 그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 빨래를 널어서 말리는 서민들의 삶과는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자의식, 우리는 편하게 살지만 당신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지 않느냐는 모종의 위협이 조금씩 읽히는 것이다.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까. 이것도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게 아닐까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지곤 했다. 

내게는 스마트폰이 있음에도 그 핸드폰으로 전화걸기조차 어려워하며,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다거나 사진을 찍서 보내는 건 아예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속옷은 손빨래를 고집하시고, 청소기를 사드린다고 해도 물걸레질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며 청소기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부모님. 내용은 달라도 다들 조금은 이와 비슷할 것이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힘겨워 하는 부모님과의 소소한 마찰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니까. 그래서 30대인 자녀들보다 더 최신형 가전제품으로 중무장한 채 온갖 기계의 작동법을 꿰뚫고 있는 60~70대 부모의 모습은 환상속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자꾸만 신경에 거슬려 해당 회사의 다른 광고들을 살펴보았다. 묘하게 거슬리던 정수기 광고 역시 이 회사의 제품이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애초에 이 회사에서 1년 전부터 밀고 있던 광고 컨셉이 '옳은 가전'이었던 것. '좋은'이나 '나은'도 아닌, '옳은'. 

옳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다른 것은 그르다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자신이 옳고 자신들의 제품이 옳다고 말한다. 그럼 옳지 않은 건 무엇일까?


왜 저들은 내가 틀렸고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건가?

...


최근 공기청정기 광고들 중 이와 유사한 컨셉의 광고들이 많다. 미세먼지와 공기오염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그에 따라 공기청정기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세먼지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창문을 모두 닫고 지낸다고 해서 막아지는 게 아니며, 고층일수록 더 높은 수치가 발견되기도 하는 게 미세먼지다. 공기 정화 기능이 있는 자가용을 이용한다고 해도 건물 지하 주차장만큼 질 나쁜 공기로 가득한 공간은 또 없으니까. 야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물론 적겠지만 상류층이라고 해도 오염된 공기와 차단된 삶을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종종 미세먼지야말로 빈부격차에 있어 나름(?) 평등한 재난에 속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평등한 재난이라는 점에서 미세먼지는 중세시대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과 비슷하다. 

에드가 엘런 포의 '적사자의 가면무도회'같은 소설을 떠올려보자. 소설에서 프로스페로 왕자는 적사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자 신하들과 귀족, 기사들, 가까운 친구들과 젋고 아름다운 여자들, 광대와 음악가, 무희들을 데리고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성으로 들어간 후 아무도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용접해버린다. 성 안에는 충분한 양의 식량과 술이 있었고 바깥 세상에서 백성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연일 파티를 열었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나간다. 어느 날 늘 그래왔듯 파티가 시작되었고 그날은 모두 가면을 쓰고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면들 중 하나가 적사병에 걸린 환자의 모습을 한 채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가면을 불쾌한 농담으로 여겼다. 자신들이 술과 여흥으로 애써 잊으려 한 성 밖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였으므로. 그러나 이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이 가면이 아닌 진짜 얼굴이라는 걸. 그는 적사병에 걸린 환자였고 순식간에 병은 성 안 곳곳에 퍼져나갔다.


공기청정기 광고를 보면 저 소설이 떠오른다. 

공기청정기가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폐쇄된 공간이다. 얼마나 좋은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느냐보다 얼마나 폐쇄된 공간을 갖추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며 경제적 계급 역시 여기서 판가름이 난다. 당신들과는 다른 공기를 마시며 살겠다는 말은 다른 중력권에서 살겠다는 말처럼 공허한 주장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문을 용접한 채 성 안에 들어가 사는 삶처럼 인위적으로 조작 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공기청정기 광고를 보면 제품이 아니라 공간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폐쇄된 공간을 갖춘 채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삶을 권장하는 느낌이랄까. 


그렇다. 내가 지금 한참 비뚤어졌다.


Posted by 늙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