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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실패의 비용

by 늙은소 2018. 6. 5.

한 달에 한 번씩 인터넷으로 장을 봐서 부모님 댁으로 물건들을 보내고 있다.
이런저런 생필품과 그 즈음이 제 철인 채소들. 특수부위 고기와 수산물 약간. 그리고 여기에 특이한 식재료 한 두 가지를 끼워넣는 식이다.
1월에는 옥돔이 메인이었고 2월에는 보리굴비가. 3월에는 두릅 한 상자, 4월에는 차돌이 주인공이었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들 사이에 한 번도 드셔본 적이 없는 것들을 끼워서 보내드리는 중이다.
물건이 도착하면 어머니는 전화를 하신다. 이런건 왜 사서 보내느냐고 한 소리 하면서도 덕분에 잘 먹겠다며 고맙다고 하시는데 그런 와중에 '대체 이건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물어오신다. 그러면 손질하는 것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설명을 해 드린다.

다른 건 사실 미끼고 핵심은 이것들에 있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걸 하게 하는 것. 설령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걸 경험하게 하는 것.
그래서 이 재료들은 적절한 비용과 양을 고려해서 구매를 결정한다. 옥돔과 보리굴비는 작은 것 5마리였고, 두릅은 2kg, 차돌은 600g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주기엔 양이 조금 모자라고 버리기엔 아깝고, 결국 내 손으로 2~3번 정도는 뭔가 해볼 만한 양. 귀찮으면 그냥 얼려뒀다가 몇 달 뒤 다시 해봐도 되는 재료들. (두릅은 데쳐서 드시고 영 아니다 싶으면 간장물로 장아찌를 담궈보시라고 했다) 가쯔오부시 간장이나 통후추 그라인더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어머니에게 배달되었다. 모두 어머니가 7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 없는 것들이다. (드셔본 적은 없지만 질색할 정도로 낯설지는 않은 재료들로 엄선해서 조금씩 난이도를 올리고 있다)

어머니는 안 드시는 음식이 너무 많으시다. 젊을 땐 가난해서 기회가 없고 바빠서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냥 싫어서 안 드신다. 중식은 그나마 조금 드시지만 일식은 단 한 입도 드셔보시지 않았고 지금도 거부하신다. 회나 초밥 같은 고난이도(?) 메뉴가 아니라 모밀국수 같은 것도 무조건 싫으시다고만 하신다. 당연히 동남아 음식이라든가 이탈리아 음식, 카레같은 것도 드시지 않는다. 치즈도 싫어하시고 마요네즈 같은 것도 드시질 않으며 빵도 드시지 않고 과자도, 튀김도 분식도 드시지 않는다. 오징어는 드시지만 낙지나 문어는 드시지 않는데 이건 싫은 게 아니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 게 크다. 커피나 차도 드시지 않으며 술도 드시지 않는다. 우유도 탄산음료도 쥬스도 드시질 않는다. 토마토 같은 것도 드시지 않으며 바나나도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한식만 드시는데 그마저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만드는 음식의 수도 몇 없어서 늘 같은 반찬이 식탁에 올라올 수밖에 없다.
음식을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건 아니셨다. 새로운 시도를 지나칠 정도로 거부했던 게 문제였다.

매일 매 끼 같은 음식을 먹는 건 자라면서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집 식탁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판 돈으로 우리 식구가 살아야 했다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만들어 파는 음식을 입에 대질 않으셨다. 누군가 가르쳐준 레시피. 돈을 주고 배운 재료 배합법. 그거 하나로 20년을 버티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트렌드는 바뀌었고 새로운 메뉴가 계속 등장했지만 우리는 그걸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가게에서는 안주로 참치 샐러드나 골뱅이 파무침 같은 게 나오고, 레몬 소주가 대유행을 했지만 어머니는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맛인지를 모르니까. 사람들이 그걸 왜 좋아하는 지 어머니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려 들지 않으셨다. 손님들이 들어와서 메뉴판을 보다가 그냥 나가는 일을 몇 번 겪으시고는 결국 참치 샐러드가 가게 메뉴판에 올라왔지만 어머니가 만든 참치샐러드는 마요네즈에 고춧가루가 범벅이 된 상태였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그대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늘 그 모습이 너무 답답했다. 가게에 손님이 얼마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골뱅이 파무침이 무슨 맛인지 알려면 최소한 한 번 쯤은 남의 가게에서 사 먹어봐야 한다. 그러나 그 돈이 아깝다며 어머니는 끝끝내 골뱅이 파무침이 무슨 맛인지 모르는 상태로 골뱅이 파무침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는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이유로 자리탓을 했다. 돈이 있으면 종로나 신촌 같은 곳에 가게를 내서 돈을 쓸어담았을 텐데 이렇게 외진 곳에 가게를 내니 장사가 잘 될 리가 있냐며. 돈이 돈을 버는 건데 우리는 그게 없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며.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일찍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삶을 원망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어머니는 새로운 걸 무조건 거부하는 분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호박죽을 만들었을 때의  모습이라든가, 도토리 묵을 만들었을 때. 직접 빨래비누를 만들었다며 자랑하셨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고 거기서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분이었다. 다만 너무 가난했고, 새로운 걸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거기에 대해 과하게 반응하는 게 문제였다. 아주 작은 실패도 어머니는 두려워했다.


요즘 음식을 만들 때마다 계속 레시피를 바꾸는데 이게 어머니에대한 반작용 같은 건가?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내린 커피도 다른 브랜드에서 나온 다른 지역 커피를 사용했는데, 새로 산 그라인더로 에스프레소 수준에 가깝게 간 다음 새로 산 드리퍼로 내린 거였다. 이렇게까지 모든 걸 바꿔서 시도해볼 필요가 있었던 건가 의문이 든다. 열흘 정도 마실 분량을 내렸는데 몸에 잘 안 받고 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여러가지 조건들을 바꾼 탓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지 비교가 불가능하고, 대조군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브랜드가 별로인건지, 케냐 거긴 한데 AA가 아닌 게 문제인건지, 너무 곱게 갈았던 게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면 나머지 조건은 동일하게 맞추고 한 가지만 바꿔봐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몇 번 하다보면 사 놓은 커피는 모두 소진될 판이다. 몇일 전 만든 반찬들도 연달아 먹는 게 싫어 냉장고에 넣어놓고 방치했더니 버려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걸 보면서 이 또한 어머니가 차려주던 식탁에 대한 반감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이렇게까지 나는 매 번 다른 걸 먹는 걸까.
성공작을 만든 다음 그걸 답습하지 않고 왜 새로운 걸 해서 이전보다 못한 결과물을 내는 것일까.

어머니가 실패에 대한 비용 지불이 두려워 아무런 발전이나 변화가 없었던 게 문제라면 나는 너무 실패를 많이 하는 게 문제인지도.
잘 아는 길을 놔두고 왜 나는 한 번도 안 가본 새로운 길을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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