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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커피를 내리다

by 늙은소 2018. 5. 23.

커피를 직접 내려서 마시게 된 지 2년 반 정도 되었다.

미식가와는 거리가 먼 둔한 입맛과 저렴한 취향 덕에 스스로 만든 커피에 쉽게 만족하며 매일 한 잔씩 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


시작은 이랬다. 

작년 1월 새해 연휴 직후 회의가 잡혔는데 거기 참석하신 분이 커피를 직접 갈았다며 회의 참석자 모두에게 커피를 한 봉지씩 나눠줬다. 그게 예가체프였다. 커피 메이커가 없다며 거절하기도 머쓱한 분위기라 그걸 받아들고 돌아오는데 향이 미치도록 좋았다.(커피 봉투를 열어 코를 들이박고 있으면 세상의 우울함은 옅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 향에 반한 나머지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지고  있는 후배가 옆에서 대신 가져가겠다며 말을 걸어오는데도 못들은 척 하고는 그걸 집에 가져왔다. 

그날 저녁 바로 집 앞 이마트로 가 가장 싼 드리퍼와 여과지를 구입했다. 태어나 처음 사 본 커피 관련 도구였다. 가격은 매우 저렴해 한 번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걸 계속 할지 말지 모르니까. 일단 한 번 내려서 마셔보고 영 별로다 싶으면 남은 커피는 후배에게 주지 뭐.


그렇게 시작됐다. 

뜨거운 물로 내려서 마시다가 점점 찬 물로 내려서 마시기 시작했다. 침출식 장비를 구매해 찬 물을 부은 뒤 냉장고에 넣고 우려낸 다음 마셔보기도 했다. 이탈리아, 영국 등 각 나라별 제품 브랜드별로 구매해보기도 하고, 케냐,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브라질... 등 커피 생산지별로 구입해 내려보기도 했다. 찬물에 내린 커피를 상온에 하루 정도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어서 마셔보기도 하고. 처음 막 나온 진한 커피와 조금 뒤에 나오는 연한 커피를 각각 나눠 담아 비교하며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너무 연하게 나오면 이걸 다시 부어 이중으로 내린 다음 어떤 맛이 나는지 확인해보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그라인더가 없어서 분쇄 커피를 사서 쓰고 있는데 입자 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핸드 블랜더로 몇 번 더 갈아 조금 더 고운 입자를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두를 사서 직접 갈고 싶다는 욕구가 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라인더를 구매했다. 그것도 핸드밀로. 이걸 계속하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저렴한 걸로 구입했다. 일단 해 보고 힘들다 싶으면 전동 그라인더를 살까 한다. 사는 김에 배송비도 절약할 겸 해서 커피 드리퍼와 여과지, 서버 등을 이전보다 좋은 걸로 구입했다. 어째 점점 수렁에 몸을 집어넣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에스프레소를 좋아하지 않는게 어딘가 싶다. 

참 다행이다. 뜨거운 물로 내린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발을 담군다면 장비마련하는데 수월찮게 시간과 돈이 들어갔을 게 분명하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에 한 잔씩 꼬박 커피를 마셔왔다. 그러나 단골 카페가 아닌 곳에서는 웬만에서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고, 단골 카페도 그리 썩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었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또 동시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커피도 제법 많아 처음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가 낭패를 겪는 일이 많았다. 단골 카페 커피도 종종 문제가 되었는데 여기는 카페인이 좀 과할 때가 있어서 불면증이 심화되거나, 두뇌 회전이 멈추지 않는 증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입에 잘 안 맞는 다른 카페의 커피들은 구역질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이런데도 10년 넘게 매일 마신게 용할 정도다) 매일 들르던 단콜 카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커피가 맛있다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내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커피 농도가 너무 진했고 시럽을 늘 적게 넣는 편이어서 조금 달게 해 달라고 하면 또 너무 시럽을 많이 넣어 적당한 비율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보통 가게들이 다 그랬다. 특히 시럽을 손님이 직접 넣게 하는 곳은 지나치게 묽은 시럽을 써서 아무리 넣어도 단 맛이 나지 않는데 시럽을 계속 넣다보면 커피가 넘치기 쉬워서 시럽을 넣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몇 모금 마신 다음 수면의 높이를 낮추고 시럽을 넣는 식이 될 때가 많았다. '맛있다'며 감탄하며 마신 날은 손에 꼽힐 정도였고 대부분은 습관처럼,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중독 상태 때문에 마신 커피였다.


직접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를 내리며 테스트해보니 최악의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커피를 내려서 마시기 시작한 초반, 더치커피를 내려 원액을 옮겨 담은 다음 남은 커피에 물을 좀 더 부어서 2차로 내린 적이 있었다. 사실 어디까지 내려야 하는건지 한계도 잘 모르겠고 남은 커피도 아까웠으며, 물을 부어도 계속 커피 색을 한 액체가 나오긴 하니까... 좀 더 내려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이때 조금이라도 진하게 내려보겠다며 찬 물 대신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정말 최악이었다. 맛이 별로인 걸 넘어 몸에서 부작용을 일으켰던 바로 그 커피들과 같은 증상을 일으켰던 것. 찬물에 녹아서 나오는 향이나 맛은 더치커피 원액에 이미 녹아서 들어갔고, 남은 물질은 뜨거운 물에서만 녹는 성분들인데 그걸 한데 모아 마셨으니 좋을 리가 있나. (카페에서 마셨다가 문제가 된 커피들은 이 성분들이 과하게 많았을 때였다.)

이런 경험 후 커피는 최대한 찬물로 내리고, 적당한 선에서 내리기를 멈춘 다음 남은 커피는 과감하게 버리면서 커피를 만들고 있다.


종류별로 다 마셔본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예가체프가 가장 마음에 든다.

시럽은 아가베를 쓰고 있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걸 시도해볼 때가 찾아오겠지. (지금 사놓은 아가베 시럽이 3kg이라...;) 연유를 넣는 커피도 시도해보았는데 영 아니었다.(맛이 문제가 아니라 역시나 몸에서 안 받음) 우유의 온도나 종류 등도 다양하게 시도해보았는데(끓이기 중탕으로 데우기, 거품기로 거품내서 넣어보기 등등)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았던 걸 보면 애초에 우유가 몸에 안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해서 결국 찬 우유를 넣어서 차가운 라떼로만 마시고 있다.

보통 한 번 내리면 350~500ml 정도를 내리는데 이 원액을 유리 보틀에 넣은 후 냉장고에 넣고 일주일 동안 마신다. (진하게 마시는 편이 아니라 열흘 동안 마실 때도 있다) 너무 적은 양을 내리면 효율이 떨어져서 한 번 내릴 때 제법 많은 양을 넣고 내리는데 이제는 이 방식이 고정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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