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0180422

by 늙은소 2018. 4. 22.

고구마를 구웠다.


작년 10월, 부모님이 고구마 한 박스를 가져오셨다. 고모네로부터 고구마가 30kg이나 올라왔다며 집집마다 나눠주러 왔다는 설명이었다. 아이스박스에 담긴 고구마는 한눈에도 양이 상당했다. 혼자서 먹기에는 무리라며 1/3만 달라고 했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알이 제법 큰 고구마가 30개 가까이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는 그렇게 우리 집 현관에 자리를 잡았다.

오븐에 구워 먹기를 네 차례. 어느 센가 현관 서랍장 위에 놓인 고구마상자는 원래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잊혀졌고 나는 우리 집에 먹어 치워야 할 고구마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주말이라 청소를 하며 버릴 것을 찾고 있었다. 종량제 봉투에 자리가 많이 남는데 없는 쓰레기라도 만들어 넣어 이 쓰레기봉투를 빨리 버리고픈 마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구마가 생각났다. 저거 분명 썩었을 거야. 아이스 박스를 열어보지 않은 지 3개월 정도 되지 않았나? 썩은 고구마가 나오리란 생각에 각오를 다지며 박스를 열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고구마는 너무 멀쩡했다. 흰 곰팡이가 조금 생긴 놈이 하나 있을 뿐. 육안으로 보기에 썩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만져보면 다를거야. 손가락이 푹 하고 들어가는 물컹하고 기분나쁜 감각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고구마들을 만져보았는데 모두 단단했고, 썩은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버릴 게 아니라 바로 구워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이 상당히 큰 고구마 7개를 욕실로 가져가 흙을 닦아냈다. 박박 문질러 닦은 후 양 끝을 칼로 잘라내고 조금이라도 상한 곳이 보이면 모두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칼이 좀처럼 들어가질 않는다. 단단한 걸 넘어 억센 느낌. 썩은 걸 걱정했는데 그 반대로 조직이 너무 치밀해져서 먹어도 되는 건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우리 이제 먹히지 않으려나봐. 다시 흙으로 돌아갈지 몰라.

빛이 들지 않는 박스 안에서 부푼 꿈을 안고 생명력을 키워나간 것 같았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라도 되려는 듯 내부를 다지고 또 다져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든 놈들을 강제로 끌고 나와 꿈을 박살내는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드는 순간이었다. 오븐에 구울 게 아니라 동네 야산이라도 찾아가서 심어줘야 하나?

하지만 배가 고팠고 우리 동네에는 야산이 없었다.

또한 야산에 고구마를 심는 게 과연 고구마의 꿈을 이뤄주는 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이건 쓰레기 무단 매립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몇 분 전까지 나도 이 고구마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던가)


해서 결국 고구마는 오븐에 구워졌고 찬란한 꿈은 열기와 함께 사라졌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 간병기  (0) 2018.05.31
커피를 내리다  (6) 2018.05.23
20180419  (0) 2018.04.22
20180414  (0) 2018.04.14
20180303  (0) 2018.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