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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초대형 문화예술 프로젝트 관람기

by 늙은소 2004. 6. 14.
최근 몇 년 사이 몇 십억정도는 가뿐히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 문화 예술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성에 차지 않는지 사상 최대 규모라는 투란도트가 장이모 연출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되었고, 이에 질세라 몇 십 마리 코끼리까지 등장하는 오페라가 등장하였다.

높은 비용을 들여 수입해 온 문화예술품을 자비로 관람한 것은 2001년 12월 '오페라의 유령'이 처음이다. 극장에서 영화는 보기는 해도 연극이나 공연에는 돈 쓰는 것이 인색한 내가 10만원이나 들여서 뮤지컬을, 그것도 꾸역꾸역 혼자서 본 데에는 브로드웨이 어쩌고하는 미디어의 홍보에 혹한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화적 사치를 한 번 쯤 경험해보고픈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문화적 사치라. 이 말은 기묘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문화는 어떻게 사치품이 되어 왔는가. 어머니 말씀처럼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이 아니니 사치이긴 할 듯 싶다. 그러나 생명유지장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사치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치에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자기 주머니에 걸맞는 범위란게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벗어나면 사치, 이를 더 넘어서면 허영이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화에도 사치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남들 주머니 사정 내 알 길 없으니, 만만하고 손쉬운 내 주머니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나에게 10만원 하는 문화예술은 조금 부담스러운 사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10만원을 들여 한 번 쯤은 '문화적 사치'라는 것을 누려보고 싶었다. 새로운 경험과 생각,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게 되리라..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리고 더불어 보급판으로 만들어진 저렴한 대체물(CD나 공연실황 DVD 등)과 진품의 차이가 어떠한지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쨌든 '오페라의 유령'은 큰 만족을 주었고, 단 한 번만 누리겠다던 '문화적 사치'를 지난 5월 다시 한 번 시도하게 되었다.
...
2003년 5월 11일 - 투란도트를 보다. 역시나 이번에도 거금 10만원.. - -;;

투란도트는 썩 인기 있는 오페라는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또한 뮤지컬도 아닌 오페라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울러 축구에 워낙 무관심한 덕에 축구장이 그리 큰 지 내 어찌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관중석에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 반대편에서 보는 게 10만원씩이나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충격은 생각보다 컸고, 당황스러웠다. 

애초의 생각은 잔디밭 반대편에 무대가 설치되고, 관객석 역시 모두 잔디밭 위에 놓였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잔디밭 좌석은 50만원을 낸 사람에게나 해당되었다. (물론 잔디밭 좌석에서도 무대가 잘 안보이기는 마찬가지)
더욱 황당했던 것은 오페라 공연을 앞둔 상암 경기장 밖에서 김밥에 생수는 물론 술까지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내가 오페라를 보러 온다며 실수로 야구장에 온게 아닐까? 캔맥주를 팔다니..

설마 정말로 김밥에 맥주를 사들고 가서 오페라를 보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으나.. 웬걸 아니었다. 좌석에는 오페라 글라스에 쇼올을 두른 사람과 함께 김밥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앉아 있었다. 안내방송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플래쉬를 터트리는가 하면, 그런 그들을 교양없다며 스스로 교양인입네 내세우며 입을 비죽이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김밥 먹고 떠드는 사람들을 무식하다 손가락질했어야 옳을까? 아니면 어짜피 축구장 빌려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을 펼치겠다 했을 때부터 이 것은 고상한 척 하는 오페라가 아님을 깨닫고 편한 마음으로 '쇼'를 즐겼어야 옳은게 아닐까? 결국 그 자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놈의 초대형 프로젝트 문화예술이 일반 대중과 소위 고상합네 하는 부류간의 차이와 상호간의 몰이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축구장, 10만원 좌석에 앉아있었지만 그 순간 제각각 자신의 문화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그렇게 표출하고 있었다.
...

작년 6월 초, 본래 5월에 해야할 '종묘제례'를 보기 위해 종묘에 갔다.
5월, 그것도 오전에 해야할 종묘제례가 한달을 연기하여 저녁에 치뤄졌는데, 그 이유인즉은.. 월드컵에 맞춰 해외 관광객이 많이 올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배경을 들으니 종묘제례가 내, 외국인 관광객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기 위해 주최하는 행사인 듯 여겨진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종친회 주최로 열린 종묘제례에는 '이회창'이 참석했고, 사회자는 같은 종친이라는 이유로 한참 동안이나 정치선전을 대신해주었다. 관람객은 바닥에 앉아서 행사를 봐야 하는데, 그 중 몇 사람은 일어나 함께 절하기를 따라한다. 관광객은 사진을 찍고, 관련한 학문을 연구하는사람들은 분석을 하고... 주위에서 놀러온 듯한 사람들과 아이들은 떠들기에 정신 없었다.

이렇게 산만하게 행사가 진행된 데에는, 그 행사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음이 가장 큰 이유다.
본래 종묘제례는 참관하는 제 3의 인물을 가정하지 않은 행사이기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군무를 추는 사람도.. 모두 신위를 바라보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그것을 받는 사람(죽은 이들) 두 측이 마주보며 진행하는 행사에 제 3자인 구경꾼이 끼어들어 혼선이 빚어지게 되었다.

구경꾼에게 잘 보이도록 하자니... 대접 받아야 할 죽은 자를 등져야 하고, 또한 문화를 제대로 복원한게 아니라는 죄의식이 든다. 철저하게 복원하자니, 구경꾼은 지루해 죽을 맛이다. 그러다보니 어중간한 복원에 어중간한 쇼가 되었는데, 거기에 정치적 목적까지 가세하니.. 어찌 죽은 자의 평안을 바랄 수 있겠는가.

최근 연이어 펼쳐지는 초대형 프로젝트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다.
대충 이름 대면 알만한 오페라,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름난 화가의 진품, 그리스 신화 조각전 등등.. 의례 방송국이나 주요 일간지 등이 하나 이상 스폰서로 참가해 홍보 하나는 기막히게 해준다. 왠지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팍팍 든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면 불편한 심기를 어찌할 수 없다. 주최측은 비싼 돈 들여 수입한 최고의 작품이라며, 그 전후 사정과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느끼는 대상이라고 세뇌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요리왕 비룡같은 만화를 보자. 타고난 천재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이 세상 누가 먹더라도 맛있다 말하게끔 나와 있지 않은가! 비룡이 만든 고기요리는 회교도나 이슬람교도가 먹어도 맛있다 말하며 자신의 종교를 바꿔버릴 것처럼 과장되게 나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 역시 이와 같아서 시대 문화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감동하는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는데 왜 나는 감동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결국 그 안에서 감동적인 무언가를 쥐어짜도록 스스로의 압력을 높이게 된다.

17세기 네델란드 회화.. 이 어찌 눈물 흘리며 달려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램브란트 작품 3개 가지고 '램브란트 전'이라 줄여 부르는 것을 뭐라 할 처지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그 정도도 감지덕지지.. 아울러 다른 작품이 들러리, 끼워맞추기가 아님을 아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리 큰 돈 들여 왔다면, 바니타스 정물에 들어가 있는 의도된 정물들과 그 상징에 대한 설명 정도 해줬어야 옳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오면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어찌 변형되었으며 어찌하여 바니타스가 나타났는가.. 아울러 초기엔 시체나 해골이 등장하던 것이 비누방울이니 지구의니 변형된 과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램브란트의 작품에서 드러난 빛 보다 오히려 감추어진 어둠이 왜 더 중요한지 한 마디 해주면 안될 건 또 무어란 말인가.

당시의 네델란드를 두고 시민계급의 성취니 상공업의 발달이 어쩌고 하지만, 어찌보면 귀족이 아닌 몇몇 계층이 무역이나 공업을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랜 중세라는 긴 시간 동안 종교와 귀족 계급은 자신을 상징화할 도상을 개발하였으나 새롭게 부상한 이들에게는 그런게 없다. 그들의 계급이나 지위는 지속성을 보장받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자신의 부와 권력을 상징화 시켜 보여줄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을 정물이나 배경의 장식품들로 이루어내고자 한다. 한 개인의 초상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얼굴 표정이나 의복에 만족하지 않고 내면의 모습까지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소품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당시의 네델란드 회화는 지극히 계획적인 측면을 지닌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보는 순간 전후 지식 없이 감동을 받으라는 강요는 너무한게 아닌가.

이러한 초대형 프로젝트 문화예술을 기획하지 말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물론 거금을 들였으니 적어도 어마어마한 적자를 내고 파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울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 또한 모르는 것 아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면 그만큼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높이와 상식의 범위를 고려했어야 옳다. 차라리 제대로 쇼를 만들든가, 상세한 사전 설명을 해주든가.. 설마 이것도 모르고 여기 왔겠냐는 듯한 무성의한 준비는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p.s. 예술의전당 큐레이터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프랑스나 영국 등과 같은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국립 미술관과 같은 곳도 정부 지원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라고 한다. 결국 운영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방학철 학생과 교육열 과한 주부대상의 전시를 기획할 수밖에 없고 한 철 바짝 벌어서 일년을 운영해야 적자를 면한다 한다.
또 아는가, 이런 기획 덕에 방학때마다 엄마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이 자라나 그 기억을 새로운 창작을 위해 쏟아내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