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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저항하기, 혹은 저항하는 척 하기

by 늙은소 2004. 6. 14.

'팔자'나 '운명'과 같은 말이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어머니들이 인고의 세월을 살아갈 수 있게 한 ‘팔자려니 한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그녀들을 굴레 속에 가둬두는 역할을 한 주범인양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표현만 바뀌었을 뿐 현재의 우리 역시 삶의 굴레 속에서 포기하며 지쳐가고 있지는 않은가?

무수한 스크린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의 종말을 막는 이들을 영웅으로 등장시킨다. 바로 그 순간, 일상은 비참하며 비극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자신의 삶, 사회, 제도, 아울러 자기 자신까지도 뒤엎어버릴 수 있는 존재를 우리는 꿈꾸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웅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러나 역시 목숨을 건 투쟁과 피 터지는 절규는 내 것이 아닌 남의 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편안히 앉아 '저항'을 즐기는게 아닐까?
이러한 안전장치 덕에 대항문화가 주류문화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계가 모호하며 선악을 구분짓기 어려운 문화라는 영역 안에 ‘저항’이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안전한 선을 사이에 두고 저항하는 것을 하나의 유희로 즐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항문화는 떠오르되 비상하지 않으며, 위협하되 주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이것은 대항문화를 지지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박수를 보내는 ‘대항문화’가 무엇에 대한 저항이며,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지에 대해 관심갖기 보다는 막연한 ‘저항에의 욕구’ 와 같은 대리 만족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실제 대항문화를 행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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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몹시 싫어하는(누군가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편은 아니다. 소심하고.. 맘도 쪼금 여리다 - -;; 믿거나 말거나) 가수 중 '이정현'이 있다. 내가 그녀를 싫어하게 된 것은 광기어린 혼자만의 살풀이인 퍼포먼스때문도 아니고, 자기 멋에 취한 연기때문도 아니다. 어느날 우연히 본 그녀의 뮤직 비디오에서 반전과 평화라는 그럴듯한 메세지를 지극히 적나라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넌덜머리가 난 까닭이다.

그럼에도 역시나 마음이 여린 나는 어쩌면 정말로 그녀는 기획사나 메니저가 '이렇게 하면 뭔가 있어 보일거다. 요즘엔 이렇게 사회적인 듯해 보이는 포장이 먹힌다'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아니 오히려 그들이 말리는데도 자기가 나서서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민족간 갈등이 어찌 표면화 되었는지, 오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반목에의 해결은 없는지 성토하며 거액을 들여 뮤직비디오를 해외에서 탱크까지 동원하며 찍는 것이 그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식량을 주는 것보다 거시적이며 거국적이며 범민족적이며 범국가적인 평화를 향한 숭고한 한 걸음 이라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저항이 장식으로 이용되는 것을 보는게 짜증스러움을 넘어서 걱정스럽고도 우울해지는 까닭은 그것을 포장으로 이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거짓된 자들의 쓰레기 결과물의 홍수와 오염때문만은 아니다.

어디까지가 저항이며 어디까지가 저항하는 척 하는 것인지 경계를 지을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HOT가 교육문제를 가사에 담는 것과 서태지가 그리했던 것의 경계를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윤도현밴드가 초기에 방송정지인지 뭔지 당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을 라이브를 통해서 퍼뜨리고 사회참여를 했던 것과 지금 그가 하는 것이 과연 그것이 옳다 생각하고 자신이 늘 그래왔기 때문인건지.. 그들이 그리 하였기에 지금의 인기를 얻게 되었으니 계속 해야만 그 인기를 유지한다는 반대 상황에 처함인지 도통 알 길이 없어진다는 데 있다.
물론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저항하는 자는 계속 힘들고 억압당하고 비참하며 빈곤할 수밖에 없다면 그 어느 누가 저항하는 척 연기를 할 것인가.. 저항하는 것이 상업적으로 먹힌다는 것은 그만큼 저항정신이 사회 저변에 스며들었다는 것일테니 기뻐해야할 일인 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그만큼 절실하게 저항해야할 대상이 없어졌기에 저항을 즐기게 되었다 자축할 일인지도 모른다. 아 그땐 참 힘들었지.. 하며..
그러나 과연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