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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왜 인조(仁祖)인가?

by 늙은소 2010. 2. 4.

* 지난 1월, 3M흥업에 올린 글


왜 인조(仁祖)인가?

루벤스와 고야의 작품 중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라는 동일한 주제의 그림이 있다. 사투르누스(Sāturnus)는 로마 신화에서 농경의 신으로 불리며, 토성(Saturn)과 토요일(Saturday)이 여기로부터 파생되었다.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한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신들의 왕의 위치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것처럼 자식들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두 먹어버린다. 이 장면을 그린 것이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다. 이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뱃속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구해낸다. 그리고 제우스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림설명 :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좌측-루벤스 / 우측-고야)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아버지의 신화는 비단 그리스와 로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 걸쳐 신화와 동화, 전설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를 계속 이야기해왔다. 사랑으로 자녀를 돌보고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부모관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과거 아이들의 생은 스스로 지켜내야만 하는 할당량에 가까웠다.



최근 인조(仁祖)시대를 배경으로 채택한 드라마가 연이어 방송되고 있다. 조선 제 16대 왕인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왕위에 올라 26년 간 재위하였다. 반금친명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전쟁에서 패한 후 장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치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 중 두 번의 전란과 반란까지 겪었던 만큼 그의 생은 부침이 심하였다. 하여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하다. [탐나는 도다]와 [추노], [일지매], [최강칠우] 모두 소현세자가 돌아와 죽은 이후 1645~49년 사이를 집중한다. 드라마는 반정과 서인 세력의 득세, 전란을 불러일으킨 인조의 실정(失政) 보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로서의 인조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더불어 소현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그림으로써, 그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애통하게 만드는데 주력한다. 

[탐나는 도다], [추노], [일지매], [최강칠우]에서 소현세자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그는 드라마 전체에 깊이 베인 어떤 슬픔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것은 공포에 사로잡힌 아버지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자신의 생마저 빼앗기고만 아들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현대극에서도 반복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이준기)은 아버지 세대가 짜놓은 판에 의한 삶을 살다 자신의 이름을 상실하고, [에덴의 동쪽]에서 이동욱(연정훈)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다른 이름으로 성장한 후, 아버지의 욕망과 대립하던 끝에 그와 비슷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추노]에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구도와 쌍을 이루는 것이 '이경식(김응수)'과 '황철웅(이종혁)'이다. 좌의정 이경식은 사위인 황철웅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를 압박한다. 그는 황철웅이 압력에 굴복해 신념을 저버릴 때마다,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 나를 버리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얻을 수 없는 것. 그런 점에서 이대길(장혁)은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와 가문이 불에 타 버렸고, 송태하(오지호)는 나라를 지키려다 아들을 죽게 하였으니,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일 뿐이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경계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지배권 바깥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끔 그를 압박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청과의 우호적인 관계구축으로 스스로 권력을 생성하였기에 소현세자는 인조의 지배권 외부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제우스 역시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의해 빼돌려진 제우스는 아버지의 영향권 바깥에서 성장한 후 돌아와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한다. 이 점은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 

우리는 자본주의가 경쟁사회임을 수용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반에서 1등을 하기 위해, 내신 1등급 유지와 명문대 진학, 대기업 취직을 위해 경쟁을 지속해왔으나 어느 순간 이르고 보니 경쟁은 동년배끼리의 자리다툼에서 벗어나 있었다. 생을 먼저 시작하였기에 집을 소유할 수 있었고, 고가로 치솟은 아파트 가격을 기반으로 부모는 가정 내 경제권을 굳건히 지켜낸다. 자신이 번 돈으로 등록금과 결혼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비용구조 속에서, 성년이 된 자녀들은 여전히 부모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그들과 자신이 단절되었으며,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할 때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의 간극은 문화와 감성은 비록 단절되었을지언정, 경제적 종속이 어는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그 관계에서 부모는 자신의 공포를 대물림하도록 강압한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구도는, 조기 유학을 떠난 자녀가 낯선 타인으로 성장해 돌아올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공포와, 자신의 세대끼리 경쟁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진출이 불가능한 20대의 절망이 용해되어 있다. 그 용융점이 참으로 차가워 불에 데인 듯 아프다.

.......

[추가 1]

글을 너무 서둘러 마무리했다. 글감이 떠오르면 개요도 작성하고 메모도 해가며 천천히 쓰고 또 고쳐야 하는데, 늘 그러지 못하고 내리 써버린다. 이 글 역시 현상은 파악했으나 그 원인을 좀 더 집요하게, 다각적으로 살피지 못한 채 황급히 끝낸 아쉬움이 있다.


최근 사극이 인조(仁祖)시대를 배경으로, 그것도 재위 말기인 1645~49년 사이에 몰려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쓸 당시인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이 시대가 처한 공포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 근원을 '아들을 잡아먹는 아버지'라는 이미지로 요약함으로써 보다 원형에 가까운 공포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라는 필터를 잠시 내려놓고 1645~49년, 소현세자의 죽음에 그토록 우리가 집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궁금하다. 사극은 불과 3년 전까지 정조(正祖)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정조와 소현세자, 광해군 사이에는 고리가 존재한다. 역사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온전한 생을 살 수 있었더라면' 하는 가정을 남기기 좋아한다.  광해군의 경우는 인조의 실정과 두 차례의 전란을 피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기대가 전제된다.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재위하였더라면, 100년 앞서 개방이 되었을 것이고 일제치하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국사 시간이면 늘 아쉬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곤 하였다.

소현세자는 이 두 가지 가정의 중간에 위치한다. 청에 8년 간 볼모로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가까이 지내며 그의 신임을 얻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는 단편적인 서술은 그를 미완의 정조로 인식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조선은 보다 일찍 개방되었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일본의 근대사와 우리의 것을 비교하며, 우리가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쳤다는 분노가 서려있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이 분노로 인해 공정성을 잃게 되지 않았을까?

인조에 대한 무차별적인 이 공격은,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는 아버지의 그림자도 아니며, 당파에 휘둘려 실정을 한 왕으로서의 평가도 아닌,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여 타이밍을 놓치고 만 무능력한 상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기회주의자보다, 시대를 읽지 못한 고집 센 선비들을 더 혐오하고 있지는 않은가. 단발령 따위에 자결하는 신하보다, 나라를 팔아먹을지언정 시대의 변화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줄 알았던 인물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 분노에 기인하지 않을까. 우리의 근대사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강박관념을 지나치게 주입한 탓에, 시대를 읽지 못한 자에 대한 지나친 분노와 타이밍 잘 잡는 자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을 하용하게 하지 않았나.

역사적 실책을 거슬러 올라가던 끝에 드라마는 1645~49년 사이에 이른 모양.



[추가 2]

2008~9년, 글에서 '아버지'에 대한 상징들을 너무 많이 떠들어댔다. 스스로 생각해도 질릴 정도인데 대체 왜 이러나. 비슷한 글을 반복하니 이쯤에서 전환해야지 싶다. 책을 너무 읽지 않아 시야가 좁아진 듯.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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