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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세 가지 소원

by 늙은소 2004. 9. 15.

어린시절 나는 늘 '세 가지 소원'을 미리 생각해놓는 아이였다. 천사든, 악마든..요정이든.. 그 무엇이든 나타나 나에게 소원을 이루어준다 말하였을 때, 현명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해두고, 그 요구사항에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 영원한 삶을 소원한 '쿠마의 무녀'는 큰 지침이 된다. 그녀가 바란 영원한 삶은 '젊음'이 배제된 것이었고, 점점 늙고 작아진 그녀는 새장 속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를 놀려대는 아이들이 '이제는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녀는 답한다. '죽고 싶어'
...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소원은 '미'라는, 적용하기 어려운 객관적 정의를 필요로 할 지 모른다. 만약 소원을 이뤄주는 이의 미적 기준이 내가 생각한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은 내가 원한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나의 Identity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면 그 때 나는 또 어찌해야할 것인가.. 이처럼 소원에 뒤따르는 문제점을 따져보고, 발생 가능한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료한 소원빌기가 나에겐 필요했다.

물론 가장 좋은 소원은 메타-소원이다. 소원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해달라는 것. 그러나 메타-소원이 이루어질 경우,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메타-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소원이 무한대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는 소원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체계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 나의 '메타-소원'을 그들(천사든 악마든 요정이든)이 거절한다고 해서 섭섭해할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세 가지 소원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20년 전에도 그랬으며, 지금에도 변하지 않은 소원 한가지는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는 것이다. 나이듦에 따라 이 소원을 향한 열망은 더욱 강해지는 듯 하다. 잘못된 지점으로 돌아가 삶을 되돌리고 싶다는 열망.. 엇갈린 인연들, 안타까운 시간들.. 그리고 현재에 대한 강한 불만이 그 소원에 녹아든다. 그러나 이 소원에도 역시 문제점은 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무엇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인가. 또한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의 관계는 어찌되는 것인가..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해선 안될 것이다.

육체가 아닌 생각이.. 즉 나의 이성이 과거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소원성취의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는 소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인가. 반대의 상황. 미래의 내가 나타나, 지금의 나에게 몸을 내놓으라 요구한다면 나는 그것을 수용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워야 했다. '미래의 나에게 모든 과거는 자신을 희생하도록 한다' 저 원칙을 세웠을 때가 아마 12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시간의 연속선 상에 늘어선 '무수한 나'를 동일한 정체성으로 연결지을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의 기억과 사건들을 소환하여도 과거의 나는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다. 나는 끊임없이 소멸하며, 동시에 새로운 존재가 스며들 듯 내 안에 들어와 자라난다. 나의 껍질도, 영혼도.. 정신도 모두 하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기억해야만 했다. 사건이나 명사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의 울림.. 형용사와 색들.. 혈관의 모든 피가 씻겨져내리는 듯한 서늘함.. 이 모든 것을 몸과 정신이 기억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순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글을 쓰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글 안에서 나는 어딘가 타인처럼 여겨지는 낯선 나를 발견한다.

현재의 우울.. 서늘한 대기.. 한껏 빨아들인 슬픔.. 이 모든 것이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시간축 위에 늘어선다. 이 과정에서 나는 우울과 서늘함과 슬픔에 함몰하면서도 그것을 어루만지는 제 3의 시선을 견지하게된다. 내가 나이며, 더이상 내가 아닌 것.. 그것은 내가 세 가지 소원을 지금도 여전히 바라고 있으며, 늘 미리 생각해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나를 기꺼이 미래를 위해 소멸시키겠다는.. 현실 부정의 극단적 소원성취욕이, 그 모든 현재에 집착하도록 하는 요인이 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이 현실을 기억하게하는 이유라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