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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얼음과 불의 노래'로 시작된 생각의 꼬리

by 늙은소 2011. 6. 7.

* 참고 : 글을 쓰게 된 계기인 [얼음과 불의 노래]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게시판에서 드라마 관련 영상를 접한 후 호기심이 들어 정보를 찾아보고 여러 생각이 나서 글을 쓴 것이니, 이 내용만으로 원작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HBO에서 George R.R. Martin의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A Song of Ice and Fire)] 중 제 1부 ' 왕좌의 게임(A Game of Thrones)'을 드라마화. 현재 시즌 1을 방영하고 있다.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여서, 드라마 트레일러를 보며 중세 영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거나 대체역사물 정도로 착각했다. 이후 판타지 장르에서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내가 왜 이걸 영국 시대극이라 생각했을까?'가 오히려 궁금해졌다고 할까?


영국 지도

원작은 대륙 웨스테로스(Westeros) 위 7개의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었다가 다시 분열하게 된 계기로부터 시작한다. 세로로 긴 형태의 웨스테로스 대륙은 영국을 확대한 형상이다.(아래 지도 참조) 영국 남부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웨스테로스 역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다른 대륙과 떨어져 있다. 언제든 분열될 수밖에 없는 7 국가간의 연약한 연결고리는 내부의 적을 복잡한 양상으로 심화시키고, 가까스로 막고 있던 외부의 적은 바다 건너에서 기회를 엿볼 뿐이다. 

영국을 포합해 서유럽의 지형을 해저까지 포함하여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주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평지에서 영국 남부의 평지가 연결되고, 스칸디나비아반도-영국북부-아일랜드로 연결되는 산악지형은 서유럽 전체를 감싸는 큰 굴곡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실루리아스기 - 데본기 사이에 진행된 칼레도니아 습곡운동으로 형성된 산맥의 일부가 영국 북부에 남아있는 셈.

빙하기에 서유럽은 얼음과 흙이 뒤섞인 땅이었으며, 영국과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해 모든 곳이 유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녹으며 사선방향으로 밀려나갔다. 그 결과 스칸디나비아는 반도의 형태가 되었고, 영국은 유럽과 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영국 남부 해안의 흰색 단층들(백악기의 어원이 이 지역의 지질학적 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글을 읽은 듯??)과 템즈 강의 방향 역시 주름의 방향과 일치하며, 영국 북부(스코틀랜드)가 남부(브리튼)와 분리되어 영국 전체가 통일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 역시 영국의 남북을 가르는 산악지역의 특성 때문이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 많지 않고 지형이 장벽처럼 남북을 가르고 있다보니 로마제국이 영국으로 건너왔을 때에도 남부를 지배하는 선에서 확장을 멈추기도 한다. 
 

웨스테로스 대륙 지도

[얼음과 불의 노래]의 배경인 웨스테로스 대륙은 영국과 유사한 형태를 확대한 선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이 지질학적 특성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이것은 비옥하고 평지가 많은 남부와 척박하고 추운 북부의 대비. 그로 인해 영국의 남과 북이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시해왔는가에 대한 갈등을 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웨스테로스 대륙의 최 북단은 아예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영국 북부로 거주민들을 추방하고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방벽을 세운 것을 차용한 듯 여겨진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이 장벽은 수천년 전 사라진 전설 속의 괴물들이 남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된다. 현재 벽을 지키고 있는 것은 스타크 가문이 지배하는 윈터펠(Winterfell)이다.

그런 식이다. 일곱 국가 중 하나는 농업 생산량이 뛰어나고, 다른 국가는 금을 비롯한 주요 광물을 생산한다. 어떤 국가는 해상 교역에 유리하며, 어떤 국가는 미지의 적(그러나 몇 천 년 간 나타난 적이 없는)을 막는 임무를 수행한다. 각 국가의 장점과 약점이 뚜렷하기에, 필요에 의해 연합할 수밖에 없는 형국. 그 필요가 통일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 필요성이 점차 희박해져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온다. 무엇보다 얼음장벽 너머에 괴물이 존재하는지 장벽 아래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더구나 이 세계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으며, 수시로 간빙기에 버금가는 겨울이 찾아온다. 1년에 한 번 겨울이 찾아와 몇 달간 지속된 후 봄이 와야 하는데, 이 곳은 몇 년간 약한 겨울이 짧게 나타났다가 바로 긴 여름이 찾아오기도 하고, 10년 간 혹독한 겨울이 계속되는 식으로 계절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인해 [얼음과 불의 노래]가 중세 유럽(중세 초중기 정도?) 에 가까운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종교적으로는 두드러진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이나,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중세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였을 수밖에 없다는.


왕권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왕이 권력을 강화할 수단으로서의 경제적 지배와 중앙집권화가 필요하다. 사계절이 일정하게 반복되지 않으면 강우량을 예측할 수 없다. 물을 다스리지 못하니 치수(治水)가 불가능하고, 농업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국가 전체의 식량 생산량이 불안정하니 세금징수가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세금 예상이 어려우니 국가적 차원의 토목이나 건설, 군대확장 등의 전략을 세울 수 없다. 경제를 계획한다거나 국가간 무역을 진행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 왕이 권력을 장악할 기반도 약하거니와, 강력한 권력자를 등장시켜서라도 이뤄야 할 공통의 목표가 백성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가 발전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북쪽의 괴물이나 남쪽의 용이 아니라, 바로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 계절이 아니겠는가. 


연합이 깨지며 가장 먼저 위협받는 국가가 북쪽의 스타크(Winterfell)인 것은 당연한 순서. 수천년 전 사라진 괴물들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던 윈터펠은 식량 생산량을 비롯한 모든 자원에서 약점을 지니고 있다. 수천년 간 다른 6개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을 것이며, 무자비한 겨울이 찾아올 때 누구보다 먼저 생존에 위협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장벽을 지키는 임무 마저 점점 그 권위가 상실되어, 각국의 범죄자들로 채워지는 형국이니...

그런데 겨울이 오고 있다. 국가는 분열되었고, 외부의 적은 바다를 건너려 한다.
얼음 벽 너머 북쪽에서 괴물이 활동을 시작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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