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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성균관 스캔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by 늙은소 2010. 10. 8.
수학사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리는 끝없이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그것은 공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수학자들로부터 제기된다. 직관적으로는 평행선 공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리가 아닌 '공리'로 만들어 증명하는 것은 실패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곡면기하학이 등장한다.


이 그림은 푸앵카레의 디스크 모형이다. 무한대로 확장된 공간에서 직선의 정의는 그림처럼 '호'를 이룬다. 유클리드의 세계에서는 분명 곡선이지만, 모형 위에서 저들은 직선이다. 심지어 직선들로 이루어진 삼각형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사회과학에서 차용하는 '패러다임(paradigm)'이나 '이념'이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특정 시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견해와 사고를 규정하는 테두리] <- 패러다임에 대하여 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저 문장을 뒤집어보자. 대상에 대한 사유와 견해가 어떠한 규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한 틀이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된다. 유클리드의 세계에서는 곡선이 직선일 수 없으며, 푸앵카레의 디스크에서는 직선 A와 만나지 않으며 점 P를 지나는 무한한 길이의 직선을 하나 이상 만들 수 있다. 이들은 그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규정된 틀 바깥을 나가지 않고서는 내부의 규칙에 반하는 예외를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세계. 그것이 패러다임이며, 이념이다.

"만약 그가 틀 안에서 그 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틀 밖에 존재한다."

...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손과 발이 제 밀도를 견디지 못해 오그라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괜찮은 성장물이며,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기특함을 잊지 않는다. 노론의 영수는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생각하기에 정조를 견제하며 왕권 강화에 반대 입장을 표한다. 정조는 노론의 권력이 장기화되며 발생한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백성을 위한다는 당위성을 확보하려 한다. 성균관의 어린 유생들은 이 싸움에 휘말리고, 그 안에서 앞으로 살아가며 지켜야 할 신념의 구체적 형태를 조각한다.

이 머리싸움에서 가장 앞선 이는 누가 뭐라 해도 역시 '정조'다. 가혹하게 표현한다면 성균관의 유생들은 정조에게 있어 장기판의 말과 다름없다. 몇 겹의 미로로 설계된 정조의 전략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는 대신들과 잘금 4인방을 적절히 활용하며 자신이 뜻한 바를 차근히 이루어나간다.

그 순간마다 푸앵카레의 디스크를 떠올린다. 정조가 뛰어난 군주이긴 하나, 그가 죽지 않고 장기 집권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고 해서 조선이 노예해방을 단행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삼권분립을 이루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김윤식'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정조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게 될 것인가. 대신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선 정조라 할지라도 그 순간이 되면 자신이 푸엥카레의 디스크 위에 존재하는 직선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리라. 여성에게 사회참여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는 결국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목격하게 되리라.

...

사극의 근본적인 한계는 시대의 틀 바깥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삼국통일이, 정복이 아닌 백성을 위하는 길이 되기에 설득력이 부족했던 것도, 과거의 틀을 현대의 기준으로 억지 해석하려 한 데 있었다. [태조 왕건]이나 [해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극이 늘 이런 한계 속에서, 현재의 요구를 수용하는 시대의 영웅을 만들려다 실패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영웅은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한 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극이 이 불가능한 괴물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라시대에 현실정치를 반영하고, 대통령의 롤 모델을 정조에서 찾으려 하는 이 기획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현대의 얼굴을 이식한 과거의 영웅은, 현재가 필요로 하는 영웅을 전근대적 인간형으로 퇴행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소작농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곳간의 문을 여는 최부자가(그러나 신분제를 철폐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기득권의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되는 21세기의 한국에서, 서민은 그저 이를 은혜로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거듭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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