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선형적 사유

절차기억만 남은 사람

by 늙은소 2010. 8. 2.

기억에 대한 연구는 1957년 어떤 환자의 뇌수술에서 시작되었다. 27살의 HM은 간질 발작이 너무 심해서 마지막 선택으로 대뇌의 측두엽 부분을 제거하는 위험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과거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과거의 기억은 남아 있었지만 바로 전에 일어난 일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사례를 통해 뇌 속에 있는 해마가 기억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번은 HM에게 복잡한 그림을 그리는 과제들을 주었다. 그림 솜씨는 날로 꾸준하게 향상되었지만, 그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즉, 무엇을 그렸는지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뇌가 무엇을 기억하는지와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대한 처리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기억은 어떤 이름이나 사실에 대한 정보를 담아두는 '서술기억'과 자전거타기 또는 수영처럼 행위나 조작을 하는 방법을 담아두는 '절차기억'으로 나누어진다. HM의 경우 서술기억은 상실했지만 절차기억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 Brain Science : 뇌를 어떻게 발달시킬까, 정갑수 지음, p. 184 중



매일 그림 그리는 실력이 향상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HM.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연상된다. 내일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잠이 들지만, 눈을 떠 보면 오늘 아침이 다시 시작된다. 죽어도 보고, 감옥에도 갇혀보지만, 눈 뜨면 오늘 깨어났던 호텔의 그 침대 속. 결국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얼음조각까지 배우며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절차기억만 남은 HM과 [사랑의 블랙홀]을 결합시키면 어떨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올 것 같지 않나?

매일 요리를 배우지만 자신이 요리를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 간단한 레시피 하나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재료를 다듬거나 칼을 사용하는 기술은 점차 숙련되어 전문가의 경지에 오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요리를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초보자의 마음으로 주방에 들어선다. 어느날 그녀는 칼로 양파를 다지며 생각하겠지. '처음 해보는 건데 어쩜 이렇게 잘할까.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아니면 이런 내용은 어떨까? 살인병기를 양성하기 위해 '서술기억'은 삭제하고 '절차기억'만 남기는 실험을 실시한다면. 자신이 어떤 작전에 투입되었는지, 누구를 살해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킬러. 그러나 몸이 반응하기 때문에 위기상황이 닥치면 즉각적으로 살인병기로서의 능력이 발휘되는. 아 잠깐... 이거 [본] 시리즈잖아!!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했는지를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 외에도 많다.

'기억상실'과 '액션'이 결합하면 늘 '서술기억'만 희생된다. 첩보원은 자신이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더라도 총 쏘는 기술은 잊지 않는게 철칙이라나 뭐라나.... 대부분의 기억상실이 서술기억만 망각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건, 무엇을 했는가는 잊어도 상관없으나, 어떻게 했는가는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일까?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더 가치있다고 여겨서는 아닌지...


SF 영화에서는 '절차기억'을 마치 캡슐에 담긴 약처럼 특정인의 몸에 주사하는 장면을 넣기도 한다. [매트릭스]에서는 헬리콥터 조종기술을 다운로드받은 즉시 헬기를 조종하고, 각종 무술기술을 다운로드한 다음 대련을 펼친다. [데몰리션 맨]에서는 주인공이 뜨개질 기술을 이입받은 통에 집에서 스웨터를 만들었다지? ㅋㅋ

어쩌면 이들이 다운로드한 기술이 누군가의 '절차기억'이 아니었을까? 혈액에서 혈청만 따로 분리해 사용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기억에서 '서술기억'과 '절차기억'을 분리해 우수한 '절차기억'만 보관해놓을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절차기억' 은행도 등장해야할 것 같고, '절차기억'만 취급하는 전문 보험상품도 등장할 것만 같다. 유명 피아니스트가 사망하면 그의 '절차기억'이 경매품으로 오를 수도 있겠다. 유언에 의해 대량복제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힌 어느 무용가의 절차기억이 해킹당했다며 뉴스에 보도되는 날이 찾아올 지도.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자신의 절차기억을 공익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기증했다는 소식도 등장하는 뭐 그런 어느 날.

'비선형적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균관 스캔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2) 2010.10.08
알리슨 드부아法  (7) 2010.08.08
재미 없어진 '동이'  (2) 2010.07.28
2010, 월드컵  (0) 2010.07.13
고지도의 현재성  (2) 201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