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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고지도의 현재성

by 늙은소 2010. 7. 8.
예일대에서 순수미술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데이빗 럼지(David Rumsey)는 예일대 미술 전문대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해왔다. 그는 1983년부터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다룬 18~19세기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해 15만 점의 지도를 모았고, 이후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의 고지도를 수집해 컬렉션은 22만 점에 이르게 된다. (최근 그는 평생 모은 고지도 22만점을 스탠퍼드 대학에 기증했다)

그는 이 중 2만여 개의 지도를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무료로 공개해왔다.
www.davidrumsey.com 
최근에는 구글 어스에서 그의 고지도 컬렉션을 서비스하고 있으며, Second Life에서도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구글 어스로 구경하다가 1800년대의 샌프란시스코 지도를 열어보는 게 가능하다. 매우 높은 해상도로 디지털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도를 확대하여 쓰여진 글자나 그림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용이하며 그만큼 정보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무난한 진행이다. 그런데 검색창에 David Rumsey를 입력하면 의아한 기사가 튀어나온다. 그가 수집하여 공개한 고지도를 수정해달라 요청하는 기관이나 국가가 예상외로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고지도에 적혀 있는 특정 글자를 지워달라거나, 글자가 없는 부분에 특정 글자를 넣어달라는 요청, 혹은 그러한 시도가 개인이 아닌 기관이나 국가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그 중 몇 건은 결국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까지 한다.

물론 거기엔 우리나라 역시 포함되어 있다. 동해에 대한 표기가 가장 큰 문제로, 동해가 등장하는 고지도 수 십 점 중 대부분의 지도가 'Sea of Japan'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때문에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고지도를 찾아내 'Sea of Corea'나 'Sea of Korea'로 기록하게끔 국가적 차원의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필요성 때문에 고지도에 무언가를 가감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바로 그런 일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자국의 고지도 중 특정 글자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고지도에서 그 글자를 삭제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미국의 FBI 역시 지도상에 나와 있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특정 지역에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그 지도를 서비스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지도는 '진실'이 아닌 '견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도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우를 저지른다. 좌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만 안심이 되기에,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도를 지나치게 믿으며 그것이 그 자체로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확신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3차원의 지구를 2차원으로 왜곡시킨 것이 지금의 지도인데 그게 어떻게 진실일 수 있는가.

지도는 견해의 단면에 불과하다. 하물며 고지도야 말해 무엇하랴.

...

미술사에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있다. 르네상스 회화 중 성당에 그려진 벽화그림이 여럿 있다. 누구나 알 만한 그 명작들은 시대가 바뀌면서 강제로 옷을 입게 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경건해야 할 성당에 나체 그림이 웬말이냐는 이유로. 다시 몇 백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그렇게 입혀진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원본 복원 작업이라 부르며 오래 된 때와 함께 '옷을 입어야만 했던 시대'가 함께 지워진다.

원본은 복원되었지만, 그 중간을 마냥 훼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선총독부로 사용되던 건물인 구국립중앙박물관 이전작업이 가져왔던 논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현재로 해석하는 것은 늘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다시 고지도.
결국 David Rumsey Map Collection은 몇 건의 요청을 수락하여 고지도에서 특정 글자를 지우거나, 몇 개의 지도를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재성이라면, 그러한 사건들을 제대로 잘 기록하고 이를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림에 강제로 옷을 입혔던 시대 또한 역사이며 원본을 복원하는 것 못지 않게 복원되기 이전의 훼손된 상태를 제대로 기록해놓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여 차라리 이 서비스는 고지도를 전시함과 동시에 고지도를 수정하거나 현재의 필요에 의해 누가 어떻게 힘을 행사하려 했는가를 기록함으로써 또 다른 역사를 수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사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런 내용이 없어서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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