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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2010, 월드컵

by 늙은소 2010. 7. 13.

2010 월드컵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경기는 다섯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기 중반 쯤 경기를 보기 시작하면, 대부분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승패의 결과를 확인하겠다는 집념보다는, 승부가 결정됐음을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감정을 쏟아내는 선수들에게 중독되었다. 어쩌면 그 순간의 그들을 보기 위해 전 후반 90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내게 있어 월드컵은 90분의 축구 경기가 아니라, 90분이 지난 후 달리기를 멈춘 22명의 감정이 폭발하며 엉키고, 위로하며 흐느끼는 그 몇 분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연기와 함께 사라질 때 사람들은 TV를 보며 '영화에서 보던 일이 벌어졌다'며 경악했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같은 일'이라는 표현을 끌어들인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 'CF 모델같은 표정'. 현실을 모방하던 미디어는 현실을 압도하였고, 영화와 드라마가 제시하는 감정 표현방법을 현실이 흉내내고 있다. 그 때문일까.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은 어쩐지 점점 더 '코스프레'가 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가 구축해놓은 내면 Index를 검색하여 적당한 것을 골라내는 양상이다.

그래서일까. 경기가 끝난 후의 선수들의 행동과 표정에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가. 필드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감정에 휩싸인 공격수. 무릎을 꿇은 골키퍼와, 더 이상 뛸 경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길 잃은 아이처럼 먹먹해진 수비수. 끌어안으며, 혹은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감정을 나누는 작은 제스쳐에 마음이 울컥하고 만다.

AP Photo/Luca Bruno


그들이 연기자가 아님에, 이것이 영화가 아니어서 고맙다.

관객을 향해 특정한 표정을 지어보이게끔 훈련된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승자와 패자. 눈물과 한숨. 차마 경기장을 떠나지 못한 채 멍하니 선 경직된 육체마저. 오롯이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겠거니 하는 안심. 그 진정성을 위해 90분이 필요했던 건가. 

영화가 모방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것. 인간. 그 발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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