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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적 사유

알리슨 드부아法

by 늙은소 2010. 8. 8.

드라마가 '미덕'을 지니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선제작, 후상영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시청자의 반응을 반영해 극의 전개를 변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몸에 좋은 약을 오래 복용하면 체내에 약물이 축적되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드라마는 그것이 '드라마'이기 때문에 결국 악덕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고스트 앤 크라임](영문명 Medium)은 사실 꽤 위험한 드라마다.

이런 유형의 드라마를 원래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고스트 위스퍼러]나 [슈퍼 내츄럴], [트루 블러드]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거나 그러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대체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가 많고, 시즌 1이 성공을 거두면 예외없이 시즌 2부터는 인류 종말의 위기와 같은 설정이 등장해 그 유치함을 견디지 못하고 더 이상 보지 않게 된다. 예외적으로 [고스트 앤 크라임]은 시즌을 더하더라도 처음의 흐름을 잃지 않는 몇 안되는 드라마였다. 주인공인 알리슨 드부아가 알고보니 조상이 천사였다든가, 지옥의 사자와 대적해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라든가 하는 황당한 설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칭찬해야 마땅하다. (저런 식으로 전개되는 드라마가 얼마나 많았던가)

더불어 여주인공과 그녀의 남편이 미남미녀가 아니라는 점. 그녀와 함께 일하는 형사와 검사 역시 평범한 몸매의 평균적인 외모라는 점에서 [고스트 앤 크라임]은 오히려 몰입도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CSI 마이애미와 뉴욕을 보라. 그게 어떻게 형사들의 평균적인 외모라 할 수 있는가!!! (헛, 참, 나, 원....)


'꿈에서 살인사건의 범인을 본다'가 드라마의 메인 카피이긴 하지만, 사실 알리슨 드부아의 능력은 저 카피를 상회한다. 잠을 자지 않을 때에도 영상이 떠오르는가 하면, 과거의 사건 뿐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보기도 하며, 살아있는 사람과 교감해 납치된 아이를 구해내는 등 무궁무진한 능력을 발휘해온 것이 바로 '알리슨 드부아'라는 캐릭터다. 그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정은 대단히 소박하게 꾸려진다. 세 명의 딸과, 항공분야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남편. 생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안 풍경은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싸움과 남편의 익살스러운 대사로 채워진다. 지극히 평범한 그녀의 삶은 범죄 수사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이 드라마를 친근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이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면서도 드라마의 메시지에는 반대해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고스트 앤 크라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범죄 수사극은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CSI 시리즈는 '당신도 자칫 작은 실수로 예기치 않게 살인자가 될 수 있으니 늘 조심하며 살라'고 주의하는 드라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이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인을 계획한 범죄자를 다루는 것 못지 않게 CSI는 자주 청소년의 우발적인 범죄를 다루어왔다. 사소한 시비라든가, 총기류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였다가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 등을 추적하며 '당신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반복한다. 이런 수사극은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가해자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더 자극함으로써 보수적인 태도를 강화하는 특징이 있다.

[고스트 앤 크라임]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CSI는 제도의 틀 안에서 범죄를 수사하기 때문에, 때로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한껏 폼 잡으시는 반장님은 그 때마다 '당신을 지켜볼 것이다. 언젠가는 당신의 죄를 입증하고 말겠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그 대사의 숨겨진 뜻은 사실 '용의자로 나온 배우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가 이후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작가의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고스트 앤 크라임]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발생한다. 알리슨 드부아가 분명 범인이라 지목했음에도 증거가 불충분하여 범죄자가 풀려나는  경우. 이런 경우 이 드라마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적용해, 범인이 다른 형태로 죄값을 치루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알리슨 드부아는 절대 틀리지 않는다. 아니 그래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너무나 많은 범죄를 해결한 탓에, 단 한 번이라도 그녀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가는 앞서 해결한 사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다. 알리슨 드부아는 모든 법 위에 선 존재다. 그녀의 수사방식은 법 규정 바깥에 있다. 함정수사를 진행하는 일도 비일비재. 그녀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수사가 지연되는 일은 있을지언정, 그녀의 꿈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 설정은 알리슨 드부아로 하여금 자신의 꿈에 대해 지나친 자기 확신을 지니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성이나, 타인의 판단, 주장보다 꿈과 직관을 더 우선시하는 인물로 서서히 변형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능력으로 인해 범인을 잡게 되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그녀가 저지르는 과오는 어찌할 것인가. 

어찌됐든 범인을 잡았으니 됐다는 결과 우선주의와, 인과응보에 입각한 형벌주의가 철저히 지켜지는 드라마를 보며, 차라리 악마와 싸워 인류를 구원하는 유치한 스토리가 덜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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