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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에 대한 공간적 해부

by 늙은소 2012. 6. 23.










영화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영화의 무엇을 볼 것인가?
선택은 다양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관찰하고, 그의 행동과 말을 관찰해 분석할 수 있다. 세상에는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쉬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단순한 인물부터 모순투성이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까지 온갖 인간상이 충돌하며 점화한다. 주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영화 속 인물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접근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 많은 영화 리뷰 중 상당수는 인물평가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이 평가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그를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합당한가 하는 결정으로 채워 진다. 착한 사람은 누구며, 악당은 누구인가? 관객은 자신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지, 누구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바라봐야 할 지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빨리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타인을 구분하여 특정 범주에 넣음으로써,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다. 또한 이것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영화 내부의 세계(환경)에 주목하는 태도가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언제이며, 사회의 어떤 부분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특이할 만한 점은 없는지 주목하며 영화를 분석해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이나 역사적 사실에 있어 가정법을 적용한 영화의 경우, 실제와 상상의 간극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이 방법은 SF나 무협, 공포물과 같은 장르가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SF 장르는 비과학, 초과학의 이론이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세계관에서 고유의 세계를 구축한다. 무협은 수련을 통해 기(氣)를 운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과장한 세계 위에서 구축된 장르다.

대부분의 장르영화는 자신이 속한 장르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다. 시대적 배경이나 지리적 경계, 혹은 몇 가지 규칙들을 포함함으로써 상당수의 영화는 특정 장르에 귀속된다. 느와르나 스릴러물에도 고유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은 고유의 정체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세계일 수 있다.


영화 내부의 세계를 분석하는 작업은 영화를 독립된 ‘게임’이라 가정하고,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과 유사하다. 이긴 사람이 모든 상금을 차지하는 게임인지. 누가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게임인지. 혹은 숨겨 진 보물을 누가 더 많이 찾는가로 우승자를 정하는지. 게임 설명서가 없는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한 후 스스로 그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방식의 해석을 영화에 적용할 수 있다.

세계를 관찰하는 현미경 렌즈를 높은 배율로 변경하면, 평범한 영화 안에서도 그 영화 내부의 세계를 분리해 관찰할 수 있다. 인물의 가정 환경이나 성장 배경을 유추한다거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시대적 배경 등. 인간보다 인간의 외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림 1]은 ‘사람’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태도다.
그렇다면 ‘사람’은 영화 속에 있는가, 아니면 영화 바깥에 있는가?
여기서 [그림 1]을 [그림 3]으로 변형하도록 한다.

(설령 논픽션이라 하더라도) 영화의 모든 인물은 가상의 존재다.
다큐멘터리에도 카메라의 시점과 편집은 존재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풍경은 프레임 안의 영역과 프레임 밖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대상은 피사체가 되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편집자’로서 풍경에 개입하게 된다. 그 때문에 영화 속 인물은 완벽한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하물며 픽션은 더하다. 영화의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와,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감독, 편집자 등 몇 사람의 작업을 통해 창조된 인물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역을 중심으로 영화를 감상할 때, 그 인물을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물을 통해 해당 캐릭터를 창조한 사람들의 의지를 읽어 낼 것인가의 선택이 뒤따를 수 있다. ‘감독은 왜 이 인물을 이러한 형태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도록 했을까?’ 질문과 함께 영화를 지켜 보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인물을 관찰하는 태도를 [그림 3]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론’이나 ‘감독론’과 같은 분석법으로 확장된다. 누가 왜 인물을 이러한 형태로 만들었으며, 이렇게 행동하도록 조종하는가 라는 관점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남자 주인공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다크나이트-배트맨)’과 ‘코브(인셉션)’의 유사성은 무엇인가?와 같은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 2]는 어떻게 변형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세계(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은, 영화 내부의 세계와 영화 외부(즉 현실 세계)의 세계로 나뉜다. 영화 내부의 세계는 앞서 말한 내용과 같다. ‘영화가 담고 있는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게임의 규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영화를 통해 영화 외부(현실 세계)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은 이보다 조금 어려울 수 있다. 일단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내부의 세계 + 현실’ 이 둘을 인식하고 있어야 ‘이 영화는 현실의 무엇을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 졌을까?’ 혹은 ‘이 영화에서 현실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영화가 정치성을 띠고 있을수록 이 질문에 답을 하기가 수월해 진다. 사회 고발성 작품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것은 관객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말과 같다. 작품 속의 메시지를 통해 작품 외부의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영화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가 반복됨에 따라 관객은 지나친 정치성이나 목적성에 반감을 품게 되었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빈번해 졌다. 결국 정치성을 띤 영화들은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감추기 위해 메시지를 교묘하게 감추는 전략을 취하며 진화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발된 전략은 정치성과는 무관한 액션영화나 오락물 등 다양한 장르에서 사용되고 있다. 불법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주인공을 영웅으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라든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을 관객이 일방적으로 한 쪽의 편을 들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 등. 여러 곳에서 영화는 관객의 의식을 제어해 왔다. 한 가지 예로 [아이언 맨]을 들어보자. 토니 스타크가 아크 원자로를 개발하여 ‘아이언 맨’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 기술을 본 딴 다른 악당이 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원적으로 아이언맨은 힘으로 힘을 제압한다는 논리를 전재로 하며, 그 때문에 끝없이 보다 강한 힘을 요구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슈퍼히어로물이 지닌 본질적인 모순이다. 슈퍼히어로들은 자경단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에게 악을 처단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에게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과연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이런 지적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사용한다. 그 한 가지 예가 폭격으로 희생되는 중동 지역의 작은 마을과,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곳에 뛰어드는 아이언 맨의 모습이다. 이 때 사용되는 도구는 언제나 순진한 눈망울로 전쟁을 목격하는 가녀린 어린아이와, 갓난아이를 안고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하는 어머니들이다. 모두가 가해자이며,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전쟁의 풍경을, 특정 집단을 철저하게 희생자인 양 포장하고 그들을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으 로 영화는 메시지를 조작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관객을 설득시켜 나가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전쟁이나 역사를 다룬 시대극을 볼 때 , 그 안에 숨어 있는 메시지과 감춰진 전략을 읽어 내는 힘이 중요하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현재의 눈’은 누구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 감시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이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통해 영 화에 숨겨진 의도가 있으며, 현재의 무엇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를 세울 수 있다. 14세기 십자군 전쟁을 다룬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여러 편 제작되는 이유를 현재의 중동 정세와 연결시킨다거나, ‘다크나이트’의 흥행이 미국 대선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와 같은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해석의 과잉은 음모론으로 흡수될 위험을 안고 있다. 가설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특정 목적을 지닌 개인이나 집단이 의도적으로 작품을 정치적(혹은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이를 악용하는 것이다. 때로는 검열기관이 이러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다른 접근도 있다. 과거의 작품을 해석할 때, 그 작품이 제작된 시대의 기준으로 작품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작품을 해석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민케인]을 1941년의 시대적, 기술적 배경 안에서 평가할 때와 2012년인 지금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1968년의 사회적 상황을 복원할 수도 있지만, 2012년의 무언가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이제 이 4가지 방법을 하나로 결합하도록 한다.
4가지 요소를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5]로 나타낼 수 있다.


영화를 읽는 방법은 [그림 5]에서 표현된 사각의 공간 중 하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두 개 이상의 영역이 겹쳐지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게 대부분이다. 인간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고, 과거와 현재 역시 분리 되어 있지 않다. 단 하나의 시각으로만 영화를 해석하는 건 오히려 불가 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 5]에 무엇을 더 넣을 수 있을까?
관객. 바로 당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다고 하는데 난 재미없는 영화 . 모두가 신파극이라며 비난할 때, 차마 반론을 재기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추억이 겹치는 통에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던 기억. 영화를 통해 당신은 다른 사람과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영화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당신만의 기억이나 경험, 취향, 기호, 가치관, 특수성이 당신에게 이 영화를 타인과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그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시각'이라는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심리학이 아닌 집단의 심리학, 인류의 원형에 접근하려는 시도. 역사 이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어져 온 신화와 이야기들. 상징들의 힘에 기대어 영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여기 포함된다.
 
이러한 접근은 영화를 해체하여 그 구조를 몇 가지 범주로 묶는 방식으로 영화를 이해하는 태도와 맞닿는다. 이 관점이 심화되면 영화를 읽는 '틀'이 고정되고, 그 틀을 사용해 영화를 해석하는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장르분석'이 그 한 예로, 각각의 작품을 독립된 개체로 보기보다 그 영화가 속한 장르를 규정하고, 장르가 요구하는 규칙과 기준에 맞춰 영화를 분석하는 태도가 등장하게 된다. 신화적 해석이라든가 구조분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 비평'의 영역은 그것이 학문,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정의됨에 따라, 자신들의 세계안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언어와 문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보편성 안에서 특수성'을 인정하는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평범한 관객이 비평가의 영화평에 반기를 드는 것은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틀을 일반 관객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도량형이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비평가가 일반 관객의 비난을, '영화 비평의 언어와 문법을 모르는 자의 문맹에서 비롯된 것'이라 치부할 때, 소통은 단절되고 분열은 심화된다.



[그림 7]은 하나의 영화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지금 내가 바라보는 방향은 무엇이며, 영화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려 하는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림 7]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림 7]에는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지금까지 나온 관점들은 영화가 아닌 대상에도 적용 가능한 기준들이었다. 이것은 문학비평에 적용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문학으로서의 영화'에 국한된 키워드다. 우리는 [그림 8]에 사운드, 미술, 시각효과, 편집, 카메라 시점과 같은 영화의 Style과 형식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추가해야만 하다.

카메라 시점을 삭제한 채 [클로버필드]를 말할 수 없고, 미술적 평가를 논외로 한 채 ‘타셈 싱’ 감독의 영화를 평가 할 수 없다. 만약 [도그빌]이 지금과 같은 디자인 세트에서 촬영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울림을 줄 수 있었을까? 여주인공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도그빌에서 부당한 폭력과 착취를 당한다. 감옥처럼 공간이 축소된 도그빌은, 모든 건물의 벽을 없앤 후 그 자리에 주차장 안내선 같은 경계만을 표시하고 있어, 폭력의 현장을 마을 주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처리한다. 물론 배우들은 마치 벽이 존재하는 양 연기하며, 그레이스가 목에 쇠사슬을 한 채 끌려 다니는 모습을 매 순간 목격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연극을 영화화한 것이긴 하지만) [도그빌]에서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인물이나 이야기 못지 않게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무대의 디자인은 관객에게 ‘폭력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가, 목격하지 못하는 것인가, 혹은 보지 못한 척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또 다른 예로 [E.T.]는 어떨까? [E.T.]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스필버그’가 아닌 ‘크로넨버그’가 감독을 했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크로넨버그였다면 소년과 외계인 사이의 우정이 아닌, 동성애적 코드라든가 성적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는 공포물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E.T.의 디자인을 [에이리언]을 디자인한 ‘기거(Hans Rudolf Giger)’가 담당했다면 감독과 배우 등 모든 요소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다른 장르의 영화처럼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Style을 구축하기 위해 어떤 요소들을 끌어 와 사용하고 있는지, 이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미술관에서 미디어 아트 전시물을 감상하는 것 같은 관람 태도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제작과 관련한 기술적 지식과 미술, 음악 등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교육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반 예술교육은 기초 실기에 해당하는 실습과, 상식 선에 해당하는 정보의 습득에 머물러 있으며, 예술로 소통을 한다거나 이에 대한 감상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훈련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관객은 영화에서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받고 그에 대한 감상을 말하려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술 영화를 관객이 외면하는 이유 중에는 관객이 예술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영화를 정의할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명명되지 못한 감성과 경험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 관객은 그 경험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등장인물과 이야기 같은, 언어로 표현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렇다면 스타일이나 표현형식은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림 9]와 [그림 5]의 관계는 [그림 10]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과 구조는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 관계에 놓여 있다. 관객이 특정 인물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 보도록 하기 위해, 카메라의 시점을 변경한다거나 포커스나 앵글 심도에 변화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 필터를 사용해 색감을 조정한다거나, 컷의 수를 늘리거나 편집 속도를 바꾸는 등 시각 정보에 해당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관객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끼쳐 영화를 다르게 해석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회 구조를 암시하고자 할 때 채택되는 도시 디자인이라든가, 혼란에 빠진 제국을 표현하기 위해 뒤틀린 양식의 건축물로 영화 미술이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표현주의 영화가 한 예)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기도 하며, 어떤 영화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무엇이 그 힘의 방향성을 결정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또 하나의 요소를 추가하도록 한다.

바로 작품의 존재 목적이다.


관객은 영화에 '존재 가치'를 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걸 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니, 떡이 나오니? 왜 시간과 돈을 이런데 허비해? 이러한 질책 속에는 생산적이지 않은 행위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문화, 예술, 혹은 오락이라 불리는 영역의 상당수가 ‘생산적이지 않다’는 평가 속에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이러한 관점이 확장되면 영화를 보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식 전달이나 교화와 같은 ‘가치’를 영화에 요구하는 시각이 등장하게 된다. 영화에 생산적 가치를 요구하는 주장이 구시대적이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영화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는 어떨까? 만약 어떤 영화가 반사회적 가치를 지지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감을 느끼게 만든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명제 안에서 과연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존재 가치’라는 항목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한 주제를 다룬다.

그 외에도 즐기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영화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유형의 관객은 영화를 관람한 이후에도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작품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기 쉽다. 극장을 나오며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며 불만을 토해 내는 관객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림 1]에서 [그림 11]까지의 요소가 영화를 설명하기 위한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에 ‘산업’이라는 항목을 추가할 수 있다. 'Structure'라는 요소 안에서 작가(감독)는 창작자로서의 분석 대상이었으나, 'Industry'에서 그는 감독이라는 직업인으로서 다루어진다. 또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배후 구조와 시스템, 산업 내에서 해당 영화가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 경제적 가치와 같은 다양한 시각으로 영화를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디 워]나 [원더풀 데이즈]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논쟁의 핵심은 Structure와 Industry의 충돌이었다. 영화의 기본이랄 수 있는 Structure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산업적(기술적 성취) 가치를 빌미로 영화 관람을 강요해선 안 되다는 측과, 한국영화 산업의 열악함을 감안하여 기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해당 영화가 불러올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애국심 마케팅을 펼치는 대작 영화들 중 상당수가 이와 비슷한 논쟁을 겪곤 한다.


관객 중에는 자신이 관람하는 영화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영향력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다. 산업적 가치를 논하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배우의 성공을 위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도 존재할 수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이유와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심리적 태도를 지닌 관객도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여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를 우호적으로 감상하는 태도를 지닌 관객도 존재한다. 그 외에도 영화 내용과 별개로 기술적 성취 여부를 평가하려 한다거나, 제작 뒷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영화를 읽는 방법 중 하나에 속한다.

MBC TV 프로그램 중 하나인 [나는 가수다]는, 순위 제를 통해 누군가를 탈락시킨다는 시스템으로 인해 공연을 보다 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더구나 해당 가수가 노래를 하기 전에 인터뷰한 장면을 삽입하여, 개인적인 사정이라든가 인간적인 호소를 할 수 있도록 편집을 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가수에게 보다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도 그런 배경이 존재한다. 영화를 찍은 직후 주연 배우가 자살을 했다든가. 남녀 배우가 사랑에 빠졌다든가 하는 뒷이야기들. 한국인이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주연을 맡은 영화라든가,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동네에서 촬영한 영화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관객과 전혀 다른 심리적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열거한 요소들을 모두 아우른 것이 [그림 13]이다.


[그림 13]은 지금까지 열거한 8가지 요소를 단순한 관계로 연결해 놓은 형태다.
6각형의 형태 안에 놓인 6개의 요소는 관련성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요소들은 단순 연결된 것도 있지만, 긴밀한 상호 관계에 놓여 있는 것도 있다. 각 요소가 다른 요소와 어떤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검토한 후, 이 모델을 변경하기 위한 검토 과정을 정리한 것이 아래 [그림 14]다.


[그림 14]을 통해 6개의 요소는 각각 3개씩 그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3개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직접적인 요소들을 의미하며, 아래의 3개는 작품 외부의 간접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위의 3가지 중 ‘작품의 존재 목적(작품의 메시지, 개념, 지향하는 가치, 철학 등)’은 아래의 3가지 요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6개 요소를 재배치할 경우 [그림 15]의 형태로 변형이 가능하다.


[그림 15]는 영화 감상이 아닌, 영화에 관한 구조모델이다. 여기에 다시 [그림 7-관객의 시선]을 결합하면 비로소 영화 감상에 관한 구조모델 [그림 16]을 완성할 수 있다.


대체 영화 한 편을 얼마나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