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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30719

by 늙은소 2023. 7. 20.

1. 

22년 12월부터 23년 6월 초까지 미친 일정과 복잡하게 꼬인 이사를 모두 소화하고 여유로운 삶으로 복귀하였다.

한 달 중 1/3 정도만 일하면 되는 시기가 찾아온 것.

4~5년 전까지만 해도 일 년 중 8~9개월 정도는 저렇게 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거래처가 늘고, 프로젝트의 수가 점점 늘어서(수입도 그만큼 늘었지만) 요즘은 반대가 되었다. 일 년 중 3개월 정도만 여유롭게 일하는 게 가능한 상황.

여유로운 일상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거꾸로 적응이 잘 안 되고 있다. 쉬면서도 뭔가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라 계속 불안함이 밀려왔고, 쉬는 것에도 적응이 필요했다.

2.

이사하면서 가전제품을 꽤 많이 구입했는데 거의 신혼살림 장만하듯 한 것 같다.

혼수목록이라며 올라오는 물건들 중 식세기와 음식물처리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걸 구매했다.

75인치 스마트TV, 대용량 4도어 매직스페이스 냉장고, 세탁기와 건조기로 구성된 워시타워, 로봇청소기, 제습기, 인덕션, 광파오븐, 스윙 기능이 있는 4인용 소파 등등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여 혼자 산 지 20년이 훌쩍 지났는데 꽤 많은 물건들이 자취생 살림살이에 가까웠다. 이사할 때마다 신림동 자취방에서 쓰던 조립식 가구들을 갖고 다녔고, 2000년대 초반 지어진 오피스텔로 이사하면서는 거기 들어가 있던 옵션 가전을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새 아파트로 입주하기 전까지 내 삶은 20년 된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걸 하루 아침에 가장 최신의 제품들로 바꿔버린 것이다. 요즘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새 아파트와 최신 가전들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삶의 질을 바꾸어준 제품 중 1위는 단연 로봇청소기다.

로봇 청소기 중 가장 유명하다는 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였는데 이렇게나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입주청소를 하지 못하고 바로 짐부터 풀어야 했는데 로봇청소기 도착 전까지 한 열흘 정도를 직접 매일 하루에 2번 이상 물걸레 청소를 하며 살았었다. 아무리 힘 주어 닦아도 마루가 깨끗한 느낌이 아니었고, 걸레질을 하면 막상 먼지가 닦여 나오진 않지만 또 발을 닦으면 계속 갈색의 먼지섞인 흙탕물 같은 게 나왔다. 그런데 로봇청소기가 도착하고 물걸레 청소를 시작하자마자 틈 사이에 있던 먼지를 모두 닦아내지 뭔가. 걸레가 갈색으로 바뀌기를 두어 번. 이틀 정도 3~4회 청소를 하고나니 더 이상 발에 먼지가 뭍어나오지도 않았고 강마루의 질감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

청소기 외에 가장 알차게 사용하고 있는 제품은 스마트TV다.

그전까지는 14년 된 42인치 구형 TV를 쓰고 있었고 인터넷 연결은 물론이거니와 외부기기 연결도 쉽지 않은 제품이었다. 크롬케스트 연결도 불가능하고 화질도 좋지 않다보니 활용도가 낮아, 점점 TV를 보지 않게 되었다.

일이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력이 점점 떨어지는 데 안경도 쓰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도 보지 않으면서 10년 이상을 살아왔다.(마지막으로 영화를 열심히 챙겨본 게 2010년이었으니 뭐)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별 감흥이 없기에 나는 내가 나이들어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더 이상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인물에 몰입이 되지도 않거니와, 공감이 되지 않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안경을 맞추고, 대형 TV를 구매하여 선명한 화질로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어찌나 공감이 잘 되던지....

바쁜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6월부터 여유시간이 생기면서는 매일 하루에 1~2편씩 영화를 보고 있는 중이다. 웨이브와 티빙 디플을 가장 높은 회원 등급으로 1년씩 구독 신청해서 쓰고 있고, 매우 만족하고 있다. 요즘 후회하는 건 75인치 말고 85를 살 걸 그랬다는 것과, 돌비 애트모스를 할 걸 그랬다는 것.

3.

TV를 꽤 만족하면서 쓰고 있는 터라, 어버이날 선물로 부모님께도 75인치 TV를 사서 보내드렸다.

4k에 사운드바와 서브 우퍼까지 구성하여 보내드렸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라 TV를 잘 사용하지는 못하시는 듯 했다.

5월에는 너무 바빠서 일단 구매만 해드리고 6월이 되어 시간 여유가 생긴 뒤에 부모님 댁에 찾아가 OTT 서비스들을 연결하고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등 몇 차례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께서 사용법을 익히실 수 있도록 직접 사용설명서도 만들고, 볼 만한 추천작품들 리스트도 만들고 꽤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께서는 어려워 하시는 편이다. 일단 이런 서비스들에 영어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한글로 써 있어도 용어 자체가 영어가 많고, 그 중에는 한글이 아니라 아예 영어로 써 있는 것들도 많다. 알파벳도 읽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다보니 부모님 눈으로 보면 이 서비스들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존재일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몇 일에 한 번씩 영화를 찾아 보시고 있어서 나름 뿌듯해 하는 중이다.

부모님 댁 TV가 두 대여서 두분 각각 따로 프로필을 만들어 드렸고, 각 프로필마다 관심작품 리스트에 직접 드라마나 영화를 넣어서 찾아보기 쉽도록 구성을 해드렸는데... 그걸 하다보면 부모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이걸 재미있어 하실까? 이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으려나???? 

장사를 너무 오래 하셨고, 일 년 중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를 하셨던 데다 가게에서 TV를 보기도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대중문화와 너무나도 오랫동안 동떨어진 삶을 살아오셨다. '대장금'이나 '허준'이라든가, '모래시계'라든가 그런 작품들도 본 적이 없으시고, 부모님의 20대나 30대에 유행했던 대중문화들조차 두 분께는 너무 먼 것들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재미있게 보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영화 '쎄씨봉'을 찾아보았었다. 저 시대면 두 분이 꽤 젊었을 때이니까 추억을 떠올리면서 보지 않으려나하는 마음. 그런데 어쩐지 동시대로부터도 부모님은 소외되어 있었고, 노동과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셨겠다 싶어 추천목록에 넣는 게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나도 그랬다.

1988년 우리는 꽤나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 드라마의 어떤 사람들도 우리처럼 힘들고 가난하질 않아서 추억을 회상하게 되는 게 아니라, 와 우리가 정말 가난하고 괴로웠구나~ 그런 생각이 드라마 보는 내내 떠올랐었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모두가 가난했으니까 너와 내 추억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며 당연하다는 듯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들어보면 거기에도 너무 큰 차이가 있어 소외되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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