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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러브 & 트러블 : '섹스 앤 더 시티'의 후예들

by 늙은소 2007. 6. 17.

러브 & 트러블

감독 알렉 커시시언

출연 브리터니 머피,산티아고 카브레라,매튜 리즈

개봉 2007.06.14 프랑스,영국,미국, 90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섹스 앤 더 시티’에 대한 열광이 빠르게 찾아온 것처럼, 딱 그 만큼의 속도와 크기로 환멸이 뒤따랐다. 첫 시즌에서 보여주었던 이 드라마의 미덕은 주인공들의 화려한 의상에 가려 이내 곧 잊혀 졌으며, 주위는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을 따라하려는 정신적 뉴요커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조금 일찍 결혼한 친구 하나는, 브런치 모임을 결성했다며 자못 세련된 양 자랑을 한다. 동료 한 명은 이 드라마의 이미지를 바탕화면에 깔고, 패션잡지 3, 4개를 보며 자기 연봉의 2/3을 백화점에서 소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캐리 추종자였다. 나는 그 4명 중에서도 캐리가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발을 사느라 쓴 돈 때문에 막상 전세금을 내려할 때 돈이 없게 된 그녀가 나는 초라하고 비참해보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신발 브랜드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무척 다른 4명의 여자들이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은 감동과 부러움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출연료를 놓고 배우들 간의 불화가 커져서 종영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를 접하며, 그들의 우정은 역시 이상화된 것일 뿐 현실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 비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에는 고정출연하는 동성애자가 두 명 있다. 그 중에서도 캐리의 친구인 스탠포드는 제법 비중 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캐리의 핸드백과 다름없는 액세서리처럼 느껴지곤 하였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존재하는 양, 그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친구 역할을 도맡았다. 게이 친구 한 명은 있어야 유행에 앞서갈 수 있다는 것인가?


드라마의 게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수다스러우며, 여자 친구들에게서 얻지 못하였던 우정의 빈 곳을 매워 주리라는 기대이다. 게이 남자친구를 둔 여주인공들은 이성과의 연애와 동성과의 우정 모두로부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갈등을 동시에 해결해 주는 것이 게이 남자친구가 드라마에서 할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과연 그럴까? 모든 게이들이 다 패션 감각이 좋은 건 아니며, 여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그 심리를 헤아리는 건 아니다. 여자 친구도, 부모 형제도, 애인도 하지 못한 역할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지나친 욕심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여주인공’이기에 친구와 애인과 게이 남자친구까지 모두 소유하기를 원한다. 이기적인 그녀들. 모두 캐리의 후예들이다.


[러브 & 트러블]은 발전된 형태의 런던 판 ‘섹스 앤 더 시티’이다. 패션 잡지 ‘보그’ 런던의 패션 에디터인 잭스(브리트니 머피)는 대학 동창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게이 남자친구 피터(매튜 리즈)와 함께 살고 있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주위에 동성애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잭스는, 파올로(산티아고 카브레라)를 게이로 단정 짓는다. 잭스에게 반한 파올로는 자신을 게이로 착각하는 잭스 때문에 졸지에 피터와 소개팅을 하게 되고,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 반한 피터는 상상 속에서 그를 지나치게 이상화한 나머지 말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채 사랑의 열병을 앓는 중이다. 뒤죽박죽 얽힌 관계들은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와 비슷한 웃음을 유발한다.


사랑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추구하지 않은 잭스는, 게이 남자친구들을 통해 부족한 사랑을 채우려 한다. 파올로를 게이로 단정 지은 후, 그에게 말 할 기회를 주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는 위험부담이 따르는 연애를 기피하려는 감정이 숨어있기도 하다. [러브 & 트러블]은 게이 남자친구와의 우정에 안주하려는 여주인공이,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고 관계의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러나 주제의식은 강하지 않다. 파올로가 완벽한 남자이고 절대적인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문제가 우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었음을 좀 더 부각시켰다면 재치 있으면서도 밀도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섹스 앤 더 시티’를 영화화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이 드라마의 후예들이 드라마와 영화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속마음 터놓을 여자 친구와 완벽하고 자상한 애인, 그리고 다리털을 밀면서까지 수다를 떨 수 있는 게이 남자친구를 모두 소망하는 그녀들은 지금도 진화하는 중이다.


자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위해 개발된 메뉴가 있다. 바로 ‘짬자면’이다. 자장면과 짬뽕을 반반씩 담은 이 메뉴는 새로운 요리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신, 주방장에게 두 가지 요리를 동시에 해내도록 요구한다. 먹는 사람은 즐겁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은 그리 즐거운 게 아니다. 주인공 잭스는 짬자면을 즐겨먹을 유형의 여성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추구하는 파올로에게, 패션사진작가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작업을 하면 될 게 아니냐 충고하는 그녀. 남들은 5,000원에 자장면 하나를 먹는데 그녀는 같은 값으로 자장면과 짬뽕 두 가지 맛을 즐기니, 얼핏 현명한 소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족, 친구 모두 다 버리느냐며 원망 들을 만한 사랑에 빠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생각했으나, 뒤돌아보면 하나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