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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황진이 : 황진이일 필요는 없는 황진이

by 늙은소 2007. 6. 26.

황진이

감독 장윤현

출연 송혜교,유지태

개봉 2007.06.06 한국, 141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황진이’를 처음 본 것은 이미숙이 연기하는 드라마에서였다. 드라마에서 황진이는 뛰어난 미모와 지성, 재능을 겸비하였으며, 그 능력만큼 도도하였다. 기생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던 나는 ‘황진이’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재능이나 미모도 물론 탐났지만,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에 동요되지 않으며, 결코 정복되지 않는 그녀의 냉정함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


황진사댁 외동딸로 성장한 진이는 혼인을 앞두고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며 하루아침에 신분을 박탈당한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일상이 신분의 경계에 의해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진이는 알게 된다. 그렇게 달라진 위치에서 보니, 세상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담 안의 세상만을 보았던 그녀는 담 밖에 나가서야 자신을 지켜주던 경계가 딛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진이는 허식에 찬 양반의 경계를 비웃고, 그들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겠노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을 ‘놈이’가 함께한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놈이는 성장 후, 이제 진이 뿐 아니라 모두를 지켜주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진이와 놈이는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위치가 되어 상대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그려진 ‘진이’는 놈이와 함께할 것을 꿈꾸지 못한다. 양반의 경계를 비웃고, 그 경계를 허물어뜨리려 한 그녀이지만 막상 사랑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 그가 그리는 세상을 멀리서 응원만 할 뿐이다.




새로운 황진이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하며 송혜교의 [황진이]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전체를 보여주되 다른 시각인 것’이 아니었다. 영화 [황진이]는 한 인물의 특정한 시기, 특정한 부분만을 제시한다. 문제는 그 부분이 인물 황진이와 융합하는 방식이다.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기존에 등장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 ‘놈이’를 통해 황진이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녀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만다. 장미희의 황진이가 삶의 고뇌를 마주하였으며, 하지원의 황진이가 예술가로서의 고통에 직면하였던 것과 달리 송혜교의 황진이는 계급과 사랑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계급의 문제와 사랑의 고통이 잘못된 주제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전반은 계급에만, 나머지 절반은 사랑에만 몰입하고 있으니 전혀 다른 두 명의 황진이를 하나의 영화에서 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황진이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무엇인가에 따라 팔색조마냥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왔다. 익히 아는 이야기임에도 새로운 황진이를 반겨보는 이유는, 그녀의 변신을 기대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거웠던 장미희와 화려했던 하지원과 달리, 사랑에 빠진 송혜교의 황진이는 지나치게 단아하고 아름답기만 해 오히려 그 멋을 잃고 말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함에 매료되었던 나에게, 사랑에 빠진 황진이의 모습은 배반당한 마음마저 안겨준다. 정복당하지 않는 그녀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의 여자인 황진이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황진이는 정복되지 않음으로써 더욱 상대를 자극하고, 호승심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늘 누군가와 겨뤄짐으로써 그 빛을 발하였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 황진이는 더 이상 황진이라 할 수 없는 무채색의 존재가 된다. ‘황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야기를 펼쳤어야 했을까? 황진이, 그녀의 이름이 낭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