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읽기

트랜스포머 : 로봇에의 로망, 새로운 역사를 쓰다

by 늙은소 2007. 7. 5.

트랜스포머

감독 마이클 베이

출연 샤이아 라보프,타이리즈 깁슨,조쉬 더하멜,안소니 앤더슨,메간 폭스,레이첼 테일...

개봉 2007.06.28 미국, 135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상과학대전’이라는 만화가 있다. 정체불명의 외계 비행체가 지구 상공에 나타나 전 지구를 위협하며 이 만화는 시작한다. UFO는 거대 괴수를 지구로 내려 보내고, 이에 맞서기 위해 지구연합군은 영웅들을 출동시킨다. 그런데 괴물과 영웅은 마치 견우와 직녀라도 되는 양 좀처럼 서로 만나지 못한다. 거대 괴수는 낙하속도와 자신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몸이 으스러져 죽고, 음속을 돌파해 날아가던 영웅은 공기와의 마찰로 머리가 떨어져나간다. 한 번의 실패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어이없는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몸을 변형해 안정적으로 지구에 착지한 또 다른 괴수는 생각처럼 빨리 움직이지 못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고, 폭포를 뚫고 날아가야 하는 지구방위대는 수압을 이기지 못해 폭포 아래 추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 사령관은 이 어이없는 시츄에이션을 끝까지 고집한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다른 행성을 침략할 때 거대괴수가 빠져선 폼이 안 난다는 것. 지구방위대 역시 폼에 살고 폼에 죽기는 마찬가지다. 폭포를 뚫고 나오든, 연못을 가르고 나오든 등장이 화려해야 한다는 것이 사령관의 지구방위 제1 철학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그들의 로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로망이기도 하다.(노망과 혼동하지 말 것) ‘로봇의 로망은 역시 자폭버튼’임을 천명하던 만화 ‘하레와 구우’도 있지 않았던가. 떨리는 손을 자폭버튼 위에 올려놓으며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 하나쯤 희생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멘트를 날리기 위해서라도 자폭단추는 꼭 있어야 했던 모양. 물론 그렇게나 위험한 버튼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은 눈감아주기로 하자.


로망은 유치함을 극복하고,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아니 오히려 빤한 전개와, 능히 예측 가능한 결말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한다. [트랜스포머]는 스토리상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꿈꿔오던 변신로봇을 현실세계에 ‘제대로’ 소환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단점을 상쇄시킨다.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하며 막강한 파워를 지닌 ‘트랜스포머’는 자신들의 행성이 파괴되기에 이르기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뤄왔다. 정의의 편인 ‘오토봇’와 악의 편인 ‘디셉티콘’은 행성 폭발과 함께 사라진 ‘트랜스포머’의 에너지원 큐브를 찾기 위해 지구에 온다. 그러나 큐브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메가트론은 북극에서 기능이 멈추고, 그 기록은 우연히 북극을 탐험 중이던 ‘윗위키 선장’의 안경에 기록되어 100여 년간 역사에서 잊혀 진다. 그런데 윗위키 선장의 후손인 ‘샘 윗위키’가 선조의 안경을 인터넷 경매에 올리면서 그 정보가 지구 외곽에서 감시 중이던 다른 트랜스포머들에게까지 알려진다. 양측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샘을 찾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오토봇 군단의 범블비는 샘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외계인과의 전쟁이나 기계와 인간과의 싸움 모두 낯설지 않은 소재이다. 거대 로봇을 실사화 하였다는 점이 ‘무엇을 등장 시키는가’의 문제였다면, 그렇게 등장한 로봇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많은 SF 영화들이 새로운 소재를 사용해 정치를 풍자했으며, 현재의 암울함과 미래에의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냉전이 사회를 지배하던 때에는 존 캠벨의 단편을 영화화한 '괴물'과, 잭 피니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같은 영화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외계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인간의 몸속에 잠입해, 겉모습은 인간 그대로지만 정신은 이미 외계인의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겉모습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모르는, 타인에 대한 공포를 SF 장르에 융합한 경우로 이후 무수하게 반복 재현되었다. 반면, 평화로운 외계인의 상징이 된 E.T.는 80년대의 달라진 세계정세를 반영한다.


대적하는 상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트랜스포머]에는 적대적인 그룹과 우호적인 그룹이 둘로 나뉘어 대립한다. 선과 악, 정의와 폭력 두 축으로 나누어 싸우는 ‘트랜스포머’들의 윤리는, 그러나 철저히 지구인들에게 해로운가 아닌가로 판명할 수 있을 뿐이다. ‘프라임’이 이끄는 ‘오토봇 군단’은 군인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행성 내에서 자신들이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반대로 ‘디셉티콘’ 일당이 전복세력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파괴된 행성을 되살릴 에너지원 ‘큐브’의 파워는 중립적인 것일까? 그들의 선과 악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것일까?


영화에는 지구인들이 큐브를 사용해 실험적으로 평범한 기계를 로봇으로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변형된 로봇들이 폭력적으로 돌변해 주변을 파괴시켰음을 주변 정황으로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로봇들에게 대입하자면 성악설의 손을 들어줘야 할 판이다. 큐브의 에너지에 의해 생성된 로봇이 ‘오토봇’ 보다 ‘디셉티콘’ 측에 더 가깝다면, 로봇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정당성이 디셉티콘에게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프라임’을 비롯, ‘범블비’ 등 트랜스포머들은 모두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할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가치관을 탄탄한 구조로 설명해주었더라면, ‘나의 거대 로봇 로망이 마침내 실현되었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텐데. 다음 편을 기대해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