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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다이하드 4.0 : 왜 맥클레인은 저열한 악당만 만나는가?

by 늙은소 2007. 7. 27.

다이 하드 4.0

감독 렌 와이즈먼

출연 브루스 윌리스

개봉 2007.07.17 미국, 128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언론인이었던 마이클 루이스는 '넥스트 마이너들의 반란(Next : the future just happened)'에서 20세기 말, 인터넷을 통해 달라진 사회에 대해 파고든다. 인터넷의 확산이 연령과 지위, 권력과 같은 기존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세대와 가족 간의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그는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 위해 그는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10대 청소년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그들의 가족과 주변 환경을 조사한다. 그 중 한 소년은 주식을 통해 6개월 간 80만 달러를 벌어들인 조나단 레벳이다. 주가조작 혐의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된 소년은 주식시장이 허구적인 가치들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며, 주가조작은 필연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당시 언론은 조나단 레벳을 주식거래의 천재인양 포장하였지만 저자인 마이클 루이스가 만나 본 조나단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조나단은 아버지가 보던 경제TV를 통해 주식거래에 대한 기본지식을 익혔고, 부모가 만들어 준 개인 통장으로 금융거래를 시작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자신이 사려는 회사에 대해 조사한 다음, 그 분석 자료를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할 법한 용어를 써가며 증권 관련 공개 게시판에 도배하듯 게시하는 방법으로 활동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게시판을 드나드는 어른들이 그의 글에 반응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조나단이 선택한 주식은 그의 예언과 비슷하게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반복한다. 조나단이 어린아이임을 모르는 어른들은 그를 적중률이 매우 높은 거물급 투자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조나단이 추천한 종목을 사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조나단의 아버지는 화만 낼 뿐,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클 루이스가 인터뷰한 많은 청소년의 주변 환경 역시 조나단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아이의 부모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가 벌인 일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해결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깨닫는다. 바로 자신의 아이가 이미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라 서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급격한 변화는 그 변화를 수용하는 집단과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 간의 갈등과 반목을 불러오는데, 여기에는 공포심과 분노가 늘 함께한다. 변화에 합류하지 않으면 뒤쳐지고 만다는 불안감은 종종 변화를 불러온 대상에 대한 분노로 돌변하곤 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을 보수적이라고 몰아세울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따라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와 방법이 다름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현실을 도피하려는 마음은 있다. 급격한 변화가 불가피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빨리 변화에 동참하느냐가 아니라, 모두 다 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야기한 변화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잔인함이 숨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세대가 10대라는 점, 그리고 다른 세대를 기다려주기에 10대들의 인내심은 크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다이하드 4.0]은 세대 간의 갈등, 혹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구성했어도 좋았을 영화였다.


흔히 ‘이과적 사고’니, ‘공돌이 마인드’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곤 하는데, 자신이 속한 학문이나 직업에 의해 사고체계가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편이다. 프로그래머의 경우 사고체계가 대단히 논리적인 편인데, 종종 그것이 지나쳐 종교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프로그램은 ‘설계’한다고 표현한다. 설계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작업으로, 한 단계 높은 층위를 사고를 필요로 한다.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빵 재료를 넣으면 빵이 나오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며, 3을 넣으면 6이, 5를 넣으면 10이 나오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실력차이가 나오는데, 누군가는 ‘3’을 입력하면 ‘6’을 내보내도록 하라는 명령어를 짠다. 그는 ‘1’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명령을 지시할 텐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모든 자연수를 프로그래밍 해도 모자라게 된다. 그런데 어떤 프로그래머는 ‘X’와 'Y'라는 기호를 사용한다. 그는 X와 Y를 정의하고, ‘곱하기 2’라는 기호의 의미를 정의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모든 수는 두 배의 크기가 될 것이며, 자신들을 창조한 주인 앞에 엎드려 복종할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 마다 창조하는 세계의 크기와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떨어지는 빗방울의 속도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중력개념을 우선 정의한 다음 모든 물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물체의 속성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도록 설계하기도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전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다이하드 4.0]의 악당 가브리엘은 바로 이런 인물이다. FBI 블랙리스트에 오를 정도의 해커들을 들러리삼아 작은 해킹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하고, 그렇게 모은 퍼즐 조각이 하나의 그림이 되도록 전체 설계를 짜 놓은 인물. 나는 그가 좀 더 전지전능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퍼즐을 끼워 맞추듯 범죄를 완성시키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디지털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었다. 각종 무기로 무장된 용병들까지 동원한 가브리엘 진영은 ‘디지털 세계의 아날로그 인간’이라며 비웃던 존 맥클레인 못지않은 아날로그를 선보인다. (권총 든 모습이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4번째 다이하드 시리즈를 보고나니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맥클레인이 상대하는 악당들은 저열하기만 한 것일까. 정치적 목적의 테러리스트인 줄 알았던 이들도,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려던악당도, 결국 ‘돈’이 목적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가브리엘의 최종 목적 역시 막대한 규모(미국의 모든 금융정보)의 돈이라 한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충분히 권력화가 가능하다. 전 세계가 공황에 빠질 것이 자명한 만큼 이것을 무기삼아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협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추적 가능성 여부라든가 흔적을 남기는 것 같은 일은 문제도 아닌 상황에서 그들은 소심하게 도망가 평생 놀고먹을 궁리만 한다. 크게 일 벌린 사람치고는 꿈이 소박하지 않은가.


나는 가브리엘이 힘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논리적인 사고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에게 있어, 아날로그적 조직구조와 사회는 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며, 변화의 속도를 방해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대로 움직이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파괴를 자행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물. 그것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캐릭터가 아닌가. 하지만 액션영화인 다이하드 시리즈는 주인공이 존 맥클레인 이기에, 맥클레인을 돋보이게 해줄 저열한 악당만 등장한다. 영화는 재미있고 액션은 화려하며 맥클레인은 여전히 멋지지만, 악당까지 멋있다면 좋지 않았을까 욕심을 부려본다.


사건을 해결하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라면 범인이 모두 소탕되었다고 해서 끝날 수 있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디지털화 된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가상의 것으로만 여겨지던 디지털 세계가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을 파괴할 수 있음을 목격하며 공포에 떨 것이며, 조나단 레벳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자신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포와 분노를 느낄 것이다. 가브리엘은 전 세계인들에게 급격한 변화의 극단을 체험하게 하였다. 가브리엘은 죽었고 맥클레인은 또 다시 영웅이 되었지만, 그가 구한 세계는 한참 후유증을 앓을 판이다. 이게 현실이 아닌, 영화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