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읽기

므이 : 복수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 사라진 영화

by 늙은소 2007. 8. 2.

므이

감독 김태경

출연 조안,차예련

개봉 2007.07.25 한국, 93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어려서 세 가지 소원을 빌라고 하면 그 중 하나를 ‘내 주위 사방 1미터 안에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할 정도로 벌레를 끔찍하게 무서워했다. 특히 다지류와 환형동물을 싫어하였고, 신학기가 되어 생물 교과서를 받게 되면 옆자리 친구에게 벌레 사진이나 그림 등을 포스트잇으로 가려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공포의 대상은 많다. 슬레셔 무비의 신체훼손장면이나 링의 사다코와 같은 등장 역시 한 없이 무서운 대상이었다. 그런 내가 대학 입시에서 다급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의대에 특차 지원을 하였으니, 붙었으면 어찌할 뻔 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벌레나 지렁이, 피범벅이 된 살점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것일까?


서양미술사에서는 바니타스 정물화라 하여, 죽음을 상징하는 사물을 의도적으로 정물에 포함시킨 그림들이 있다. 해골이나 썩은 과일, 벌레 등이 등장하는 이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죽음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삶의 허무함을 일깨우고 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꿈틀대는 벌레나 떨어져 나온 살점, 기괴하게 생긴 귀신들로부터 죽음을 떠올리기에 우리는 공포심을 느끼는 건 아닌지..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공포심에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베트남에서의 촬영으로 유명해진 영화 [므이]는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신인 소설가인 윤희(조안)는 절친했던 친구 서연(차예련)으로부터 베트남의 전설 므이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소설의 소재가 절박했던 윤희는 서연에게 저지른 잘못을 애써 외면하며 서연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서연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었다. 3년 전 그녀는 자신을 둘러 싼 거짓된 소문들을 뒤로 한 채 베트남으로 떠났고, 그런 소문들을 사실인양 포장하여 소설로 쓴 윤희는 자신의 글을 서연이 보지 않았으리라 믿으며 절친한 친구의 가면을 쓴 채 베트남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함께 므이의 전설을 추적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윤희의 주변에는 므이의 저주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윤희는 서연이 자신을 초대한 의도를 의심하는 한편, 므이의 저주와 대적해야하는 이중의 상황에 처한다. 서연이 여전히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윤희는 므이의 저주를 추적하면 할수록 서연이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두 명의 주인공은 각자 진실을 숨긴 채, 친구의 얼굴로 서로를 마주본다. 서부영화의 결투장면처럼, 누가 먼저 총을 꺼내들 것인가 숨죽이며 지켜보는 것 같은 긴장감이 영화 전반에 흐른다. 므이의 저주가 긴장감을 높이는 기폭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공포를 구체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긴장감은 훼손되고 만다. 복수와 저주, 진실과 거짓의 팽팽한 공기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종일관 영화는 음산한 음향효과와 무언가 곧 나타날 것 같은 연출을 반복한다. ‘링’이 그랬고 ‘주온’이 그랬으며 ‘장화홍련’도 그랬던 연출기법을 무비판적으로 남발하여 [므이]는 오히려 영화의 장점을 상실하고 만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은 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는 내게 송충이를 잡아다 던지며 놀리곤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거나 주저앉아 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남자애들은 자신이 큰 승리라도 거둔 듯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상대가 비명을 지르거나 운다고 해서 그것이 곧 승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벌레를 보여주고,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피를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영화가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공포영화들이 있다. 잔인하게 일그러진 육체와 기분 나쁘게 끈적이는 점액질, 기괴한 소리들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관객이 소리 지르고, 깜짝깜짝 놀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때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다. [므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서로를 속이는 두 명의 주인공이 진실에 서서히 다가가며 형성된다. 그러나 정작 복수는 긴장감 없이, 상대가 공포심을 느낄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행해지고 만다. 허무하다. 나 같으면 저런 식의 복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서서히 숨을 조이듯 갉아먹는 죽음. 그게 더 공포스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