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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심슨 가족, 더 무비 : 초절정 음모이론

by 늙은소 2007. 8. 30.
심슨 가족, 더 무비

감독 데이빗 실버맨

출연 댄 카스텔라네타,줄리 카브너,낸시 카트라이트,이어들리 스미스

개봉 2007.08.22 미국, 86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맬 깁슨이 음모이론의 희생자로 등장해 미국 사회에 떠돌던 온갖 음모이론을 들춰내던 것이 1997년 영화 컨스피러시(Conspiracy Theory)다. 수돗물에 불소를 넣는 이유는 전 국민의 치아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에 솔깃했고, 외계인 실험이든 아니든 로스웰에는 무언가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음모이론은 결과로 드러난 사건들의 배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구성된다. 때문에 배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을 때까지만 음모이론은 존재한 다. 음모가 밝혀지면 그것은 더 이상 추측이나 가설이 아닌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음모이론은 여러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히지는 못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배후를 거대한 대상으로 확장함으로써 찾아오는 쾌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물이 상원의원인 것 보다는 대통령이, 대통령 보다는 외계인인 것이 더 짜릿하지 않겠는가!) 그 뿐 아니다. 음모이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명할 뿐 아니라, 관련한 모든 현상을 음모이론의 틀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디 워’를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씨의 발언은 사실 ‘디 워’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디 워’ 논쟁을 더욱 극대화함으로써 결론적으로 ‘디 워’의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음모이론의 생성이 가능하다. (그 반대로 ‘디 워’를 옹호하며 악플을 다는 극렬 디 워 옹호론자들이 사실은 ‘디 워’의 안티를 생성하기 위한 ‘안티 세력의 전략집단’이라는 설도 만들 수 있다.)


음모이론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음모였음이 밝혀지는 것’이 바로 음모였다는 이중 음모론에서 종종 확인된다. 영화 ‘토탈 리콜’은 일종의 이중 음모론에 해당한다. 화성개발의 음모를 파헤치는 주인공의 모든 행동이, 사실은 배후세력이 노렸던 진짜 전략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극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이런 매력으로 인해 음모이론은 사실여부를 추적하고 밝히는 노력보다는, 좀 더 흥미롭고 충격적인 가설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8년 동안 꾸준하게 방영되어 온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심슨 가족(The Simpsons)]은 불쾌함마저 일게 할 만큼, 한심하고 멍청하며 무능력한 가장 '호머 심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애니메이션이다. 처음 이 시리즈를 보았을 때 아직 청소년이었던 나는 재미보다는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다. 그것은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죄의식과 호기심이 뒤섞인 상태와도 같았으며, TV 동화처럼 착한 사람들만 나오는 세상을 비웃던 나였지만 막상 그 세상이 너무나 참혹하게 제 3자에게 난도질당하는 것을 목도하였을 때의 서글픔과도 닮은 그런 감정이었다. 이것이 ‘심슨 가족’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극장에서 다시 만난 ‘심슨 가족’에게서 묘한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보니 ‘호머 심슨’은 단지 멍청하기만 한 도넛 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호머 심슨’이 미국 노동자와 중산층을 대변하며, 그런 이유로 현실을 풍자하고 미국을 조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한심함이 미국의 한심함이며, 그의 이기심이 미국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호머 심슨은 한심하고 이기적이면서도 어딘가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360도 공중회전을 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또한 호머 심슨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들은 어떤가. 리사 심슨의 음악성과 지적 능력, 그리고 정치력(그녀는 연설과 설득, 집회를 좋아한다)은 이미 시리즈물을 통해 알려진 바이다. 리사 뿐이 아니다. 문제아인 줄로만 알았던 바트는 알고 보니 리사를 능가하는 천재 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시즌 18), 아직 갓난아이인 매기는 왠지 장차 초능력을 쓸 것만 같다. 하긴 호머의 아버지가 신의 계시를 받는 인물인데 오죽할까.


호머 심슨이 18년 간 장기집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단지 그가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나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는 종종 비범하며 초인적이었고, 지나치게 운이 좋은.. 그야말로 누군가 비호세력이 있을 법한 인물이었던 것이다.(그토록 많은 사고를 저지르고도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있다니!!) 나는 호머가 ‘유전자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특수한 생명체’라든가,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외계인에 의해 선택된 인물이라는 내용이 등장해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호머’가 인기 있는 것은 그의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모자란 가운데서 종종 발하는 그 만의 비범함 때문 아니었을까? 아~ 또 음모론이다.


...


이 영화를 개봉 당일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보러갔다.

시작부터 극장 내 좌석을 비추더니 호머 심슨은 'TV에서 하는 걸극장에서 왜 보냐' 소리친다. 클라이막스로 가는 중에는 '다음편에 계속'이라는 자막이 뜨고 화면이 어두워지기까지 한다. '그래.. 이 영화 분명 마지막에 조용히 끝날 리 없다.'  내심 기대하며 영화가 끝난 다음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데도 자리를 지키며 앉아있었다. 극장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자리를 비우고, 좌측 출구에는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노려보며(사실 그의 표정은 커녕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대체 언제 나올거에욧!!'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소심한 나는 마지막에 대한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야 할 지 망설여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 말고도 남아있을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고, 4줄 정도 뒤에 앉아있는 남성 한 명을 발견하며 안도의 한숨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길고 긴 엔딩크래딧 후'심슨 가족'은 실망시키지 않고 다시 한 번 등장했고, 정말로 끝이라는 듯 극장은 한 층 더 밝아졌다.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나온 나는 노려보기는 커녕 '참~ 대단들 하십니다'는 느낌의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짓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함께 나온 엔딩크레딧 동지가 내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는 나를 향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영화 재미있으셨어요?' 질문을 한다. 이 느낌.. 몇 년 만이었더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느껴졌던 묘한 느낌은 바로 이 질문이 있기 전까지의 긴장감이었으리라. '작업을 걸 것인가' 망설이는 남자들에게서 나오는 전파랄까? (진실로 그들은 모종의 전파를 발사하곤 한다)

그러나... 극장에서 잠깐 뒤돌아 봤을 때 보았던 그의 모습은 막상 밝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확인하자.. 나보다 10살 이상 어려보이는 얼굴로 놀라움을 주었고, 그 놀라움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집 앞 극장이라고.. 함부로 미니스커트 입고 긴머리풀른 채 앉아있던 내 잘못이겠지만) 그는 그 질문 이후로 단 한 마디 없이 앞만 바라보며 1층까지 침묵을 지키며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뛰어나가듯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는 미안함과 약간의 속상함, 조금의 설레임으로 '심슨 가족, 더 무비'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