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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미스터 브룩스 : 나는 살의(殺意)에 시달리고 있다

by 늙은소 2007. 9. 9.

미스터 브룩스

감독 브루스 A. 에반스

출연 케빈 코스트너,데미 무어,데인 쿡,윌리암 허트

개봉 2007.08.30 미국, 120분

※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늦은 낮잠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목을 베었다.
작고 날렵한 면도용 칼을 손에 쥔 채, 덤벼들 듯 다가오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나갔다. 
그곳엔 테니스의 서브 넣는 동작과 같은 가뿐하면서도 힘에 넘친 리듬이 있었다. 팔이 큰 사선을 그리며 아래로 향할 때마다 사람들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칼날이 세포를 파괴하며 피부조직을 파고들 때, 그리고 혈관이 규칙적이던 피의 흐름을 어쩌지 못해 외부로 피를 뿜어낼 때 전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점점 미쳐갔다.


누구나 이런 꿈을 한 번쯤 꾸었을 것이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모든 꿈은 흑백이라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붉디붉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느낌. 땀에 흠뻑 젖어 눈을 뜬 나는, 조금 전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광기로부터 아직 헤어나지 못한 자신에게서 낯선 존재를 발견하며 소름끼쳐했고, 내 안에 살인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나는 종종 살의(殺意)에 시달린다. 바쁜 걸음을 잡으며 도를 믿는지 묻고, 자신의 종교를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가리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살의를 느끼곤 한다. 뿐만 아니다.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시켜놓고는 끝내 그 돈을 주지 않아 한 학기 등록금을 못 내게 만들었던 작자에게도 나는 살의를 느꼈다. 삶이 계속될 때마다 살의의 대상은 늘어만 가고, 그만큼 죽어 마땅하다 생각되는 사람들의 수도 증가한다. 그러나 살의와 살인은 명백히 다른 행동이다. 상상한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살인이야 오죽할까. 때로는 잔인한 상상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잠재우기도 한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는 상상으로 고통을 위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니체는 '잠언과 간주곡'에서 이야기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러한 생각으로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운 밤을 참고 견딜 수 있다.'
범죄영화, 특히 폭력성이 심각한 영화들을 놓고 찬반양론이 팽팽히 대립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분노를 영화를 통해 대리 해소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미스터 브룩스]는 그러나 이상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온 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고 연쇄살인의 여러 형태와 동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살인에의 충동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추긴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잠재된 힘이 있는 영화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힘을 중화시키는 장치가 함께 있었기에 영화는 수작이 아닌 범작이 되고 말았다. 그 장치는 캐스팅으로, 배우이기에 앞서 스타가 되고 만 두 주인공이 영화에의 몰입을 방해하였던 것.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스터 브룩스]는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연쇄살인마는 영화나 문학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다. 그들은 살인을 연속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그 곳에 자신만의 특징을 담아냄으로써 살인행위를 통해 자신의 Identity를 구축해나간다. 그들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살인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방편으로 살인을 택하는 이도 있다. 종교적 이유가 거론되기도 하고(세븐), 인류에 대한 혐오로부터 비롯된 살인(양들의 침묵)과 그 반대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정의의 한 형태로 자행되는 살인(데스 노트)도 있다. 반복된 살인은 그 대상을 무가치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거기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유산을 노리고 자신의 배우자를 살인하는 연쇄살인범은 확실히 두려움의 강도를 약하게 한다. 내가 그들의 범죄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 그렇다.(그 누가 나의 가난을 노리겠는가!)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이어서 대화를 통한 타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안전한 살인자라 할 수 있다. 반면 두려운 경우는 개인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살인자다. 그들은 생명에의 존엄성과 영혼을 믿지 않으며 살인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살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살인자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심취한 나머지 희생자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원한을 사 증오어린 칼날에 쓰러질지언정, 정육점 고깃덩어리 취급 받으며 죽고 싶지는 않다고 나는 영화를 보며 생각하곤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보며 동등한 존재로 죽는 것과 짓밟히듯 사라져버리는 것은 다르지 않겠는가.


[미스터 브룩스]의 주인공 '얼 브룩스(캐빈 코스트너)'는 후자에 해당하는 살인마다.
그에게는 살인을 지시하는 상관도 추구할 경제적 이익도 갚아야 할 원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살인을 반복하는 이유는 살인행위가 주는 쾌감과 전율, 그리고 예술적 성취 때문이다. 그는 충분히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지만, 살인에의 충동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대상을 작품 재료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억누르고 조절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 노력은 번번이 욕망에 굴복한다. 그때마다 신을 찾고, 참회에의 기도를 읊조리는 그. 얼 브룩스는 2년 만에 다시 연쇄살인을 시작하고, 사진에 찍히는 실수를 범한다. 자신의 범죄 장면을 촬영한 스미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점차 다가오는 형사 앳우드(데미 무어)의 추적을 피하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된 상황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찾아온다.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주인공 얼 브룩스는 태생적 살인마로 뛰어난 동물적 감각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의 딸 제인이 이제 막 살인을 시작한 연쇄살인범의 징후를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딸의 손에 죽을 수도 있음을 예감하며, 이제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경계해야할 대상이 된 딸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살인에의 욕망은 자신과 유사하나 그 접근법이 확연히 다른 제인의 광기는 얼 브룩스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것이었다. 얼 브룩스는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자신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대상을 충분히 관찰하고 범죄의 완벽성을 기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제인은 살해욕구가 지나치게 강해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그 대상에 있어서도 친구든 애인이든 심지어 아버지라도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

그래서 이 영화는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녀를 둔 상류층 가장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얼 브룩스는 자신의 딸이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벌린 일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함과 사악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완벽한 살인자인 그이지만, 딸 앞에서는 무력한 아버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