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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뱅크 잡 : 범죄에 있어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

by 늙은소 2009. 1. 7.


뱅크 잡
감독 로저 도널드슨 (2008 / 영국)
출연 제이슨 스태덤, 섀프론 버로즈, 대니얼 메이스, 스티븐 캠벨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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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포함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범죄자가 되겠다고 답하는 아이는 없다. 우리는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나, 의사, 교사, 대통령 같은 번듯한 직업을 희망이라 말하지 세계 최고의 은행털이나 위조지폐범을 꿈꾼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어떤 아이들은 철통 같은 보안을 뚫고 명화를 훔치거나 중앙은행을 털고, 첩보위성을 해킹하는 등 금지된 행위에 매력을 느끼며 성장한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감히 상상만 할 뿐 이를 실행할 엄두조차 내지 않은 채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언젠가 재미 삼아 화폐위조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본 일이 있었다. 지폐는 위조도 어렵거니와 제작된 위폐를 시중에 유통시켜 안전한 통화가치로 세탁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위폐범은 이 단계에서 덜미가 잡힌다.) 하여 투입자금대비 수익률이 낮은 주화(500원)를 위조하기로 (가상의) 결정을 하고, 생산라인에 필요한 시설과 투자금액을 단계별로 정리, 그렇게 제작한 위조주화를 어떻게 안전한 자금으로 변환시킬 것인지 다각도로 모색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보았다. 당시 사업계획서에는 사업의 타당성과 수익구조, 단계별 유통방안과 함께 만약의 경우 발각되었을 때의 행동지침을 몇 가지 시나리오를 토대로 제시하였다.

범죄에 있어 행위의 완결성을 결정하는 것은 위폐를 제작하거나 명화를 훔치는 것과 같은 핵심 범죄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밀반입한 마약을 어떤 유통조직에게 넘길 것인가와 같은 범죄행위 이후의 단계에 대한 계획 역시 중요하며, 만약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이 있는지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놓는 것 또한 ‘프로 범죄자’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여기 은행은커녕 시골 우체국조차 털어본 적 없는 아마추어 범죄자들의 은행털이기가 있다. 영화 [뱅크 잡]은 평범한 소시민이 은행을 터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범죄행위에 있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1971년 영국 런던, 차동차 판매상인 ‘테리(제이슨 스타뎀)’는 빚을 청산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 그때 옛 연인이자 은퇴를 앞둔 모델 ‘마틴(세프론 버로우스)’이 찾아온다. 그녀는 로이드 은행이 주말 동안 경보기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함께 은행을 털자고 그에게 제안한다. 테리는 이를 수락하고 함께 할 동료로 사진가 ‘케빈’, 양복점 주인 ‘가이’, 포르노배우 ‘데이브’, 콘크리트 전문가 ‘밤바스’를 불러모은다. 이들은 로이드 은행 옆 상가를 빌린 후, 상가 지하를 통해 은행 안전금고실에 도달할 수 있도록 터널을 뚫는 계획을 세운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테리 일당은 은행털이에 성공하고 각자 배당금을 챙겨 도주하려는 순간, 장물 속에 예기치 않은 물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게 된다. 이들이 훔친 물건들 중에는 영국왕실의 치부가 담긴 사진과 뇌물을 받은 경찰 리스트가 기록된 매춘조직의 상납금 장부, 고위인사들의 섹스스캔들을 찍은 사진까지.. 영국 각계의 수뇌부를 협박할 목적으로 제작된 여러 범죄조직들의 비밀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협박 하던 자들과 협박 당하던 자들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이 문서를 차지하기 위해 범죄조직과 경찰, 영국 군사정보국(MI5)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테리 일당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궁지에 몰린 테리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정보를 “누구”와 협상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과 교환하는 대가로 쓸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협박 받던 자들에게 돌려주고 그 대신 자신의 범죄행위를 무마해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협박하던 자들에게 주는 대신 목숨을 살려달라고 할 것인가.



프로의 세계에 갑자기 뛰어든 아마추어는 때로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킨다. 프로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아마추어는 저지르기 때문이다. 프로들은 자신이 훔칠 대상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불필요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훔친 물건을 처리할 방법과 만약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방안까지 마련한다. 명화를 훔치는 절도조직은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미술관에 침입한 뒤 목적한 그림만 훔쳐갈 뿐 미술관 전체를 쓸어 담는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다. 훔친 미술품은 ‘도난품’이라는 이름표가 붙기 때문에 처리가 어렵고, 그 때문에 판매루트를 우선 확보한 뒤 물건을 훔치는 순서로 진행된다. 보통 도난 미술품은 도난품임을 알고서도 구매하는 미술 애호가에게 판매하거나, 해당 미술품에 대한 도난 보험금 지급액에 부담을 느끼는 보험회사와의 협상 거래조건으로 이용되거나(미술관에 돌려주는 대신 보험금의 일부 금액을 절도범이 가져가는 조건), 범죄조직의 마약거래과정에서 현금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뱅크 잡]은 피해자가 신고하기 꺼려하는 안전금고를 노린 은행털이범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추적당하지 않을 현금과, 처리 가능한 귀금속을 목적으로 은행을 턴다. 이것은 범죄를 저지른 후 재빨리 외국으로 도피해 훔친 돈과 장물을 다른 경제가치로 전환하려는 계획에 부합되는 방식의 범죄이다. 그런데 여기에 ‘권력층을 협박할 수 있는 정보’가 개입되며 이들의 도피를 지연시킨다. 협박을 통해 권력을 얻는 방식은 협박할 대상과 가까이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훔친 돈을 들고 현장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은행털이범과 달리, 협박범들은 정보를 손에 쥔 채 마지막 순간까지 협박대상자 주변을 떠나지 않고 그의 숨을 쥐락펴락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완성시킨다. 한탕주의 은행털이가 ‘지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협박범죄와 만나면서 발생하는 파장. [뱅크 잡]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뱅크 잡]은 1970년대 초 실제로 발생하였던 여러 사건들을 토대로, 이 사건의 중심에 로이드 은행 도난사건이 놓여있음을 유추하여 설계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동생인 마가렛 공주가 거론되고, 영국 내에서 흑인인권운동을 펼쳤던 마이클 X가 등장하는 등, 영화는 사실성을 강조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뱅크 잡]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요소는 바로 영국의 치부이다. 위선적인 모습을 한 왕실의 섹스 스캔들과 경찰권 내부의 비리 등, 영화는 그 시대 영국이 감추려 한 허물을 소재로 삼고 있다. 흑인 인권운동이 자금조달을 위한 폭력과 권력획득을 위한 범죄로 연결되었을 때, 저항문화는 대의와 수단의 불일치에 타협함으로써 스스로의 순수성을 포기하였다. (마이클 X는 사업가 마빈 브라운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재산을 강탈한 것으로 기소되었으며, 그의 보석금을 지불한 것은 존 레논이었다.) 영화에 소재가 되는 여러 사건들은 대부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기밀사항들로, 언론통제가 내려졌고 2054년까지 기밀 유지 조치가 취해졌다. 현실은 로이드 은행 도난과 마이클 X 사건 등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보안사항으로 정리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2054년이 되기 전까지는 냉정한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가 내려진 게 아닐까? 

은행털이범의 성공적인 범죄행위는 통쾌하지만, 자신의 치부를 폭로하는 영화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조금 의아해졌다. 미국을 조롱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박수를 치던 것과 달리, 영국에 대해서만은 그 귀족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계급주의적 낭만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잠재되어 있던 모양이다. 신데렐라를 너무 많이 보고 자란게지...